젊은 시절 ‘광장’이라는 소설을 읽지 않은 지식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 어느 날 신문을 읽다 보니 이 작품이 40년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내 나이처럼 소설도 나이를 먹은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아직도 젊었다. 바로 ‘광장’에 대한 작가의 애착 때문이었다. 쉼표와 어휘 하나하나에 이르는 작가의 열정은 여섯 번에 걸쳐 ‘광장’을 개작하게 하고 그 동안 내용도 많이 바뀌었다.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계속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신을 추구한 것이다.
난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내가 만들고 있는 제품도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내가 처음 백색가전 부문을 맡았을 때 많은 사원들은 백색가전사업이 반도체, 정보통신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많은 사원들은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일까? 난 안타까웠고 그 날부터 사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임직원들에게 강조하였다. “백색가전은 인류가 존재하는 한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품이다.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없이 한번 살아 보라. 가전제품은 산소 같은 존재다.”
그리고 백색가전제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와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백색가전이 사랑받고 애용되는 길은 디자인 경쟁력과 함께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리드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원들이 나의 생각에 공감을 해주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만든 제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고 최고의 브랜드로 인식시키는 데 온 힘을 쏟고 있다.
그 덕분인지 현재 중국에서는 지펠 냉장고가 외국의 유명브랜드보다 고가로 팔리고 있다.
생활이 바뀌면 제품도 바뀌어야 한다. 주거형태가 바뀌면 거기에 들어가는 제품도 함께 바뀌어야 하고, 고객의 라이프 스타일이 달라지면 제품의 사양도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즉 제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소비자와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고 있다.
90년대말 불기 시작한 디지털 열풍으로 인해 정보기술(IT), AV, 통신사업을 제외한 백색가전사업은 사양사업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백색가전이 아날로그 제품이기 때문에 미래가 비관적이라는 의견에 대해 나는 할말이 있다. 왜냐하면 제품을 보고, 듣고,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아날로그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이란 프로세서이고 도구와 방법에 불과하다.
백색가전도 편리하고 안락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디지털기술을 많이 활용할 필요가 있다. 최근 백색가전 제품들도 시스템화, 홈네트워크화되면서 점점 디지털기술을 많이 활용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 최인훈씨가 본인의 소설을 여섯 번이나 개작하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애착을 갖고 환경에 적응하여 혁신한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요즘 나는 백색가전 제품을 만들고 있는 사장이라는 사실에 참 행복하다. 사람들의 생활이 더 윤택해지고 편리해질 것을 생각하면 힘이 난다. 퇴근할 때 휴대전화로 에어컨을 틀어 놓고, 집에 도착하여 시원한 거실에 앉아 냉장고에서 꺼낸 캔 맥주를 마시며 ‘내가 만든 제품들이 오늘의 피로를 풀어 주는구나’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한용외 삼성전자 생활가전총괄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