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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자식은 희망없는 이공계 절대 안보내"

입력 | 2002-03-24 18:55:00

왼쪽부터 김용준 박경수 차성수 전재석씨


‘이공계 위기론’이 우리 사회의 뜨거운 화두로 등장해 있다. 이공계 대학을 지망하는 학생수가 해마다 줄어들고 재학생들 사이에서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무성하다.

실제로 이공계 대학 졸업생들이 사회에 나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느끼는지 사회 활동을 하고 있는 대학 85학번 고교 동창생 4명이 한 자리에 모여 얘기를 나눴다.

▽사회〓대학 졸업 후 어떻게 지내고 있나.

▽김용준〓대학원 졸업하고 7년 정도 회사에 다닌 뒤 2년 동안 학원강사로 일했다. 그 후 3년 넘게 공부해서 변리사가 됐다. 기술자로서 재미있게 일했고 나름대로 보람도 있었지만 나이 들어서는 더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시켜주지도 않을 테지만….

▽차성수〓대학원 마치고 기업에 들어가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순수과학(지질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을 살리지 못했다. 월급을 조금 받더라도 계속 공부할 수만 있으면 좋겠는데 그런 길이 없는 게 현실이다.

▽박경수〓졸업 후 1년 정도 직장을 다니다가 그만두고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 조교 생활도 하다가 2년 전 선후배들과 벤처기업을 차렸는데 도박하는 기분이다. 미래가 좀 암담하게 느껴진다. 사법고시를 왜 보지 않았나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전재석〓인턴부터 12년째 의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 대로 지낼 만하고 다른 생각은 별로 안 한다. 곁눈질할 능력이나 시간도 없고….

▽김=딴 데 신경 안 쓰고 산다는 것 자체가 미래에 대해 고민해 본 사람으로서는 부럽게 느껴진다.

▽사회〓주변에 있는 이공대 출신들의 생활은 어떤가.

▽박〓대기업에서 연구원으로 10년 근속하고 연봉 2500만원 이하인 동기가 있다. 연봉 5000만원 넘는 사람은 드물고 4000만원도 잘 받는 편이다.

▽김〓학력고사 327점으로 물리학과에 수석으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한 후배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뒤늦게 기업체에 들어갔다.

▽차〓수학과 출신 가운데 잘된 경우를 보면 수학올림피아드에서 수석하고 교수하는 사람말고는 내가 아는 한 다 학원강사다.

▽박〓수석으로 물리학과에 입학한 동기는 학위 과정을 포기하고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나갔다. 그게 살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전〓우리 때 물리학과 정원이 70명인데 우리나라에서는 10명 정도 소화할 수 있다는 얘기가 돌았다.

▽박〓서울대 공대 나와서 연구자로 성공한 사람은 교수밖에 없다. 87학번 공대 후배가 온라인 게임업체 리니지 사장인데 그 사람을 공대 출신 중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친다.

▽사회〓왜 이공계를 선택했는가.

▽김〓당시 이공계 출신을 양성하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고 과학자가 되는 것을 반겼기 때문이다. 공대 출신들은 희소가치도 높았고 대우도 상대적으로 지금보다 나았다.

▽박〓성적이 좋은 학생들은 다 이과에 갔고 또 공대에 가는 분위기였다. 나도 별 생각 없이 그 흐름에 따랐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이과 전교 1등은 대개 다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전〓그렇다. 공대 나온 동기들은 ‘서울대 공대에 들어가 17년 후에 집도 못 살 거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고 말한다.

▽차〓과학자가 되고 싶어 지질학과를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 독일 과학자 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우리 때만 해도 수입보다는 사회적 가치, 직업 윤리 등을 고려해 학과를 선택했는데 결과적으로 국민윤리 교과서에 속았다.

▽사회〓우리 나라 이공계의 현실을 어떻게 보는가.

▽차〓40대에 기술자로 남으면 도태되거나 해고된다. 살아남으려면 관리자로 변신해야 하지만 연구만 하던 사람이 그러기가 쉽지 않고 경쟁력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월급쟁이의 별이 이사라면 연구소장은 연구원의 별이다. 그러나 ‘떨어진’ 별이다. 30대 때는 일반 회사원과 비슷한 생활을 하지만 연구만 계속하면 40세도 보장이 안 된다.

▽차=외국 엔지니어링업체와 파트너로 일하는데 60살 넘은 엔지니어가 많다. 외국은 실력만 있으면 전문화된 작은 회사를 만들 수 있지만 우리 나라는 공무원들을 상대해야 하는 등 실력만으로 승부를 걸 수 없다.

▽김=미래를 생각하고 변리사가 됐는데 회사에서 하던 일보다 많이 힘들긴 하지만 중요한 차이는 개업 등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차〓사람에게 중요한 게 희망인데 그 희망이 없다는게 이공계 위기의 본질이다.

▽사회〓다시 대학에 간다면 무엇을 전공할 것인가. 자녀들은 어디 진학하길 바라는가.

▽박〓그래도 공대를 지망하겠다. 대신 정말 열심히 공부해서 교수가 되겠다. 우리나라에서 공대를 나와 제대로 공부하고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는 길은 교수 뿐이다. 우리 아이는 치대나 한의대에 갔으면 좋겠다.

▽전〓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의대는 안 간다. 내 아이의 의대 진학도 반대다. 훈련 과정이 힘들고 비인간적이다.

▽차〓자연과학을 공부하고 싶지만 한국에서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외국에 나가 공부하고 그곳에서 정착하고 싶다. 내 아이는 국제기구 등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김〓대학 진학은 잘 모르겠고 우리 아이는 의대로 갔으면 좋겠다. 아내가 의사인데 내가 거쳐온 길이나 현재 생활을 봐도 그게 더 낫겠단 생각이 든다.

정리〓손효림기자 aryssong@donga.com

▼대담 참가자▼

전재석(全在錫·37) 을지병원내과과장·의대85학번

차성수(車誠洙·36) SK건설 과장·지질학과 85학번

박경수(朴慶秀·35) 벤처기업가·기계설계학과 85학번

김용준(金容俊·36) 변리사·항공우주공학과85학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