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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一. 젊은 자객(1)

입력 | 2002-03-28 16:07:00


卷一. 四海는 하나가 되었건만

젊은 자객 ①

하남(河南) 양무현(陽武縣) 남쪽. 대하(大河)의 도도한 물줄기가 화북의 기름진 황토지대를 휘젓고 흐르다가 멀리 길을 바꾸어 사라지면서 남긴 넓은 퇴적층 모랫벌이 있었다. 세월의 비바람에 깎인 크고 작은 모래 언덕들이 마치 물결 같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하여 사람들은 그곳을 박랑사(博浪沙)라 불렀다.

진(秦)제국의 수도 함양(咸陽)에서 시작해 함곡관(函谷關)을 빠져 나온 관도(官道)가 그 박랑사를 가로질렀다. 새로 통일된 대륙의 동서를 잇는 그 길은 낙양과 팽성(彭城)을 지나 북으로는 임치(臨淄), 남으로는 회계(會稽)에 이르렀다.

서력 기원 전 218년, 진 시황제(始皇帝) 29년 4월 어느 날이었다. 늦은 봄 햇살에 점점 달아오르는 한 모래언덕 뒤에 몸을 감춘 두 사내가 이따금 고개를 들어 멀리 관도를 살펴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젊었으나 생김과 차림은 그들이 함께 있는 것조차 이상하게 여겨질 만큼 서로 달랐다.

한 쪽은 크지 않은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와 잘 생긴 걸 넘어 예쁘다는 느낌을 줄만큼 희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다른 쪽은 열자 가까운 키와 깍짓동 같은 몸피에다 살갗은 검붉고 눈코는 험상궂게 느껴질 만큼 억세 보였다. 차림도 마찬가지, 한쪽은 갖춰 입은 귀공자 차림인데 다른 쪽은 거동의 편의만을 헤아려 지은 듯한 검수(黔首〓일반 백성)들의 거친 베옷이었다. 남장한 미녀 같이 잘 생긴 사내의 성은 장(張) 이름은 량(良) 자는 자방(子房)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래 희씨(姬氏)로서 그때로부터 꼭 십 이년 전에 망해버린 한(韓)나라의 유서 깊은 가문의 자손이었다. 그의 조부 희개지(姬開地)는 한나라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애왕(襄哀王)때 재상을 지냈고, 그 아버지 희평(姬平)은 희왕 (釐王) 도혜왕(悼惠王)때 재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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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황제가 한(韓)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영천군(潁川郡)을 설치했을 때 량은 아직 나이가 많지 않아 벼슬길에 나가기 전이었다. 하지만 부조(父祖) 이대가 오세(五世)에 걸쳐 섬긴 한나라의 은덕으로 노복(奴僕)만도 3백 명이 될 만큼 그의 집안은 번성했다. 량은 그 한나라를 위해 원수갚기를 맹세하고 그때부터 전 재산을 털어 진시황을 죽일 자객을 구했다. 그 무렵 아우가 죽었으나 자객을 구하는데 쓸 재물이 줄어드는 게 아까워 장례식조차 제대로 치러주지 못했을 만큼 량의 복수심은 치열했다.

때마침 동쪽 바닷가에 창해군(蒼海君)이라 불리는 이가 숨어살며 많은 역사(力士)를 기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때부터 성을 장(張)으로 바꿔 자신을 감춘 장량은 천리를 걸어 창해군을 찾아보고 만금을 바치며 자신의 뜻을 밝혔다. 어떤 이는 그가 동이(東夷)의 군장(君長)이라 하지만 창해군은 아마도 외진 바닷가에 숨어 반진(反秦)의 세력을 키우고 있던 협객으로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 장량의 말을 듣자 기꺼이 한 역사를 내놓았다.

“좋소. 마침 내게는 백 이십 근 철퇴를 부젓가락 휘두르듯 하는 장사가 있소. 게다가 그에게도 진작부터 여정(呂政〓원래 秦 왕실의 성은 趙 또는 瀛을 썼으나 진시황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그가 呂不違의 아들이란 뜻에서 呂씨로 봄)을 죽이고자 하는 뜻이 있었소. 반드시 공을 도와 망국(亡國)의 한을 풀어줄 것이오.”

그 장사가 바로 지금 장량 곁에 있는 사내였다. 하지만 장량은 목숨을 걸고 함께 엄청난 일을 꾸며 왔으면서도 그의 출신은 커녕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처음 소개를 받고 그 이름을 물었을 때 창해군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운 좋게 여정을 저격(狙擊)해 죽인다 해도 당분간 천하는 진(秦)의 것으로 남아있고 그대들은 쫓기는 몸이 될 것이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쫓기면서도 함께 하는 것이 비록 아름다워 보이나 그만큼 더 고단하고 힘들 것이오. 진작부터 깊이 사귀어 온 적이 없을 바에야 각기 나뉘어져 쫓기고 숨는 게 낫소. 그리고 그때는 서로를 알고 있어 득이 될 게 없소. 내 저 장사에게 공을 알리지 않을 테니 공도 굳이 저 사람을 알려고 하지 마시오.”

장이와 진여는 한(韓)나라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망해버린 위(魏)나라의 명사들로 젊어서부터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고 지내온 사이였다. 위나라를 멸망시킨 진나라는 뒤탈을 없애기 위해 장이에게 1000금, 진여에게 500금의 상을 걸고 찾게 하였으나 함께 달아난 둘은 아직까지 잡히지 않고 숨어 있었다.

장량도 창해군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로부터 몇 달 함께 시황제의 움직임을 살피다가 마침내 이 박랑사 길목에서 동쪽으로 순수(巡狩)를 나서는 시황제를 저격하기로 작정한 그날까지도 서로에 관해 묻기를 피해왔다. 하지만 이제 얼마 후면 각기 흩어져 쫓기게 되고, 어쩌면 다시는 살아서는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장량은 새삼 그 사내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너무 늦는 것 같소.”

장량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사내를 슬며시 돌아보았다. 틈을 보아 그의 이름이라도 물어둘 작정이었다. 장량과 나란히 모래 언덕에 기대 관도(官道)를 내려다보고 있던 사내가 가만히 한 곳을 손가락질했다. 관도가 빠져 나오는 서쪽 구릉지대 쪽인데, 눈 여겨 살피니 아련히 먼지가 일고 있었다. 적지 않은 인마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별과도 같았다.

긴장과 까닭 모를 조급함이 잠시 장량의 몸과 마음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창해군에게서 얻어온 역사(蒼海力士)는 산악처럼 태연하기만 했다. 곁에 벗어두었던 길쭉한 상자를 말없이 끌어당겨 뚜껑을 열었다. 상자에서 나온 것은 길이 한 발에 어른의 팔뚝보다 굵은 쇠몽둥이(鐵椎)였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불시에 몸을 날려 치지 않으면 여정의 위사(衛士)들이 가로막아 일을 그르칠 수도 있소. 나는 저기 관도 바로 곁의 모래 언덕으로 옮겨 몸을 감추고 여정을 기다려야겠소.”

몸을 일으킨 역사가 철퇴를 가볍게 어깨에 매며 말했다. 장량도 얼른 그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역사가 그런 장량을 눈길로 주저앉히려는 듯이나 지긋이 쏘아보며 말했다.

“선생은 이대로 계시오. 여기서 일을 살피시되 내가 손을 쓰고 난 뒤에는 성패(成敗)에 상관 말고 얼른 이 자리를 떠나시오. 불행히 내가 일을 그르쳐도 반드시 살아 남아 여정(呂政)을 죽여주어야 하오.”

지금까지 소식을 염탐하고 일을 채비하고 꾀를 내는 일은 장량이 도맡아 왔다. 그런데 이제 갑자기 역할이 바뀌어버린 듯 역사 쪽에서 오히려 장량이 해야할 바를 일러주고, 뒷일까지 당부하고 있었다. 그게 다시 장량을 혼란시켜 잠시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역사는 묶여있는 자신의 말 쪽으로 성큼 성큼 다가가더니, 고삐를 풀어 안장에 감은 뒤에 철퇴로 가볍게 말 엉덩이를 쳤다. 말이 놀란 울음소리 내며 남쪽으로 내달았다.

(살아서 돌아갈 마음을 버렸구나…)

그런 생각에 퍼뜩 정신이 든 장량이 소리 높여 역사를 불렀다.

“대협(大俠). 대협. 잠깐 멈추시오!”

관도 쪽으로 휘적휘적 걸음을 옮겨놓고 있던 장사가 장량을 돌아보며 무겁고도 깊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선생께서 무도한 진나라를 미워하고 여정을 죽여 망국의 한을 풀려고 하신다는 것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합니다. 선생도 나를 그 이상으로 아실 필요가 없습니다. 원래 자객은 누구에게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서로 얼굴을 알아버렸으니 오히려 너무 많이 알게된 셈입니다. 이제부터는 서로 얼굴마저 잊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곧장 관도 가로 걸어나가 길가의 작은 모래 언덕 사이에 몸을 숨겼다. 그 태도가 어찌나 결연한지 장량은 말없이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원래 몸을 숨기고 있던 모래 언덕에 그대로 머물러 멀찌감치서 관도를 내려보며 시황제의 노부('簿〓황제의 행차)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렸다.

서편 하늘의 먼지가 더욱 자옥해진 걸로 보아 그 사이에도 시황제의 행차는 쉬임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한곳에 웅크린 채 숨어 기다려야 하는 쪽으로서는 무한히 길고 더디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숨막히는 듯한 긴장감으로 바싹바싹 타들어 가는 입안을 마른침으로 적시면서 기다리다 보니 불현듯 묵은 적개심이 되살아났다.

지금 장량이 목숨을 걸고 노리는 것은 진의 시황제 정(政)이었다. 그러나 불같은 분노와 함께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시황제가 아니라 진의 연횡책에 놀아나던 옛 한(韓)의 사대부들이었다.

(방금 원교근공(遠交近攻)의 칼날이 저희 나라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는데도 소리높이 연횡(連橫)을 외쳐대던 눈먼 공경(公卿)들. 스스로 진나라의 개가 되어 짖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합종(合從)을 비웃던 대부(大夫) 원사(元士)들. 그대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지금 천하가 앓고 있는 이 고통을, 이 억지스러운 혼일사해(混一四海)의 후유증을 그대들도 보고 있는가. 망해버린 조국을 애통히 여기며 키워가는 한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는가.)

전국(戰國)시대의 중국을 보면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두고 동쪽에 연(燕) 제(齊) 조(趙) 한(韓) 위(魏) 초(楚) 여섯 나라가 세로로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강력하지만 야만스럽고 이질적인 진나라의 대두에 맞서 세로[종]로 늘어선 여섯 나라가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합종책(合縱策)이고, 가로[橫]로 진나라와의 개별적 화친을 통해 안전도 보장받고 실리도 챙기자는 것이 연횡책(連橫策)이다. 이 중에서 한(韓)을 가장 먼저 망하게 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이 가장 일찍부터 연횡책에 노출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말할 것도 없이 연횡책을 구상한 것은 출세욕에 눈먼 진나라 밖 여러 나라의 세객(說客)과 종횡가(縱橫家)들이었다. 그러나 그 정책은 처음부터 진(秦)나라를 위한 것이었고 진나라에 의해 채택되었다. 연횡가들은 크게는 진나라에 들어가 재상이 되었고, 적으면 저희 나라에 앉은 채로 진의 간세(奸細) 노릇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