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경제 포커스]수도권은 지금 ‘땅 전쟁’

입력 | 2002-03-28 17:10:00


동익건설 박성래 사장은 최근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신규 사업용으로 사들이던 경기 고양시 벽제동 땅값이 하루아침에 평당 25만원에서 80만원으로 뛴 것.

사정을 알아보니 A건설사가 땅 주인들에게 평당 80만원에 사겠다며 가계약을 했기 때문이었다. 박 사장이 직접 주민들을 만나 통사정을 했지만 땅값 기대치는 이미 올라가 있는 상태. 동익건설은 이미 사업부지 중 절반 이상을 사놓은 상태여서 나머지를 추가 매입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돈이 묶일 판이다.

하는 수 없이 A사를 찾아가 협상을 했지만 땅을 더 높은 값에 사든지, 사업을 함께 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답변만 듣고 왔다.

이렇듯 건설사들이 땅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다. 아파트 및 오피스텔 분양이 유례없는 호황을 보이고 있기 때문. ‘땅 전쟁’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아파트가 대거 쏟아져 나오는 용인시 일대는 아예 쓸 만한 땅을 찾기 어려운 실정이다. 몇년 전만 해도 골칫거리였던 분당과 일산의 상업·업무용지도 동이 났다.

돈이 된다면 ‘꾼’들도 몰리는 법. 건설사뿐만 아니라 차액을 노린 전문 브로커가 활개치고 있다. 이들 때문에 정상적인 사업이 어렵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땅 주인 찾아 미국도 간다〓오피스텔 사업을 하는 DK건설 황성식 이사는 작년 말 미국에 다녀왔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에 있는 땅을 계약하기 위해서다. 땅 주인이 이민을 간 탓에 직접 현지로 건너가야 했다.

“어디라도 가야지요. 며칠만 늦었어도 다른 업체가 계약했을 겁니다.”

토지 수요가 극에 달한 곳은 서울 강남. 아파트건 오피스텔이건 지어만 놓으면 팔리기 때문이다. 빈 땅이 없는 만큼 단독주택이나 빌라를 한꺼번에 사들여 아파트나 오피스텔을 짓는 게 일반화됐다.

토지 매입은 대형 건설사보다는 중소 시행사가 전담한다. 워낙 경쟁이 심하다보니 의사결정이 느린 대형사가 땅을 구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땅을 매입한 시행사는 계약금만 지불하고 잔금은 시공을 맡긴 건설사로부터 대여금 형식으로 지원받는다.

땅 수요가 늘면서 가격도 오를 만큼 올랐다. 강남 단독주택지는 평당 1200만원, 대로변 상업용지는 평당 3000만원을 웃돈다. 작년에만 30% 이상 올랐다는 게 업계의 설명.

▽신도시 상업용지 동나〓토지공사의 미매각 토지도 급감하고 있다. 98년 말 366만평에 달했던 재고량이 작년 말에는 209만평으로 감소했다.

특히 오피스텔을 지을 수 있는 상업·업무용지가 불티나게 팔렸다. 분당과 일산의 대로변 용지는 동이 났다. 토공 분당사업소 황재성 과장은 “도시계획이 확정되지 않아 팔지 못하는 땅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상업용지가 없다”며 “지금도 하루에 10여건 정도 문의가 들어올 정도로 인기”라고 전했다.

최근에는 개인까지 땅 전쟁에 가세했다. 이 달 초 분양된 용인시 신봉·동천지구 단독주택지는 최고 3176 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작년 12월 공급된 구리 토평지구 단독주택지에도 13필지에 1794명이 몰려 청약경쟁률 138 대 1을 보였다.

▽판돈 수백억원짜리 도박〓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근에는 투기꾼이 극성이다. 도시계획이 확정된 곳이나 건설사가 매입 중인 땅 일부를 사들인 뒤 비싼 값을 요구하는 방식이다.

대가건설 차진태 사장은 “누군가 주택사업을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면 브로커들이 현장 일부를 사놓고 잠적해 버린다”며 “이 같은 ‘알박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업이 힘들다”고 털어놨다. 사업 정보는 부동산 중개업소나 세무서 등기소 등에서 구한다. 택지 관련 업무가 지자체로 이관되면서 기업 비밀도 공공연히 새 나가고 있다.

투기 자금의 규모도 커지는 추세. 강남에서 ‘땅 작업’(땅을 사들이는 일)을 하는 A사 관계자는 “단기간에 큰돈을 벌 수 있는 만큼 수백억원대 조폭자금도 흘러든다”고 귀띔했다.

돈이 몰리자 투기 방법도 다양해지고 있다. B사 관계자는 “주택과 주택 사이에 있는 개인 명의의 도로를 산 후 사업을 꼭 해야 하는 건설사에 10배의 금액을 요구한 적도 있다”며 “만약 건설사가 사업을 포기했더라면 도로 매입자금 150억원이 묶이는 모험이었다”고 회고했다.

▽‘분양가 인상’ 이유 있는 항변〓업계에서는 투기장으로 변질한 토지시장이 결국은 아파트 분양가 인상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건설사가 폭리를 취하기 위해 분양가를 높이기보다는 땅값이 워낙 올라 정상적인 가격을 맞추기 힘들다는 것.

동익건설 박 사장은 “땅값이 20% 오르면 분양가는 최소한 10% 이상 상승한다”며 “토지 유통시장이 흔들리면 결국 피해는 소비자에게 돌아간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일부 전문가들은 “시공능력을 갖춘 업체만 땅을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산업개발 이방주 사장은 “토공이 조성하는 택지지구라도 실제 사업을 할 업체에 배분해 유통과정에서 생기는 가격거품을 제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