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선상(선생)” “할머니”.
노(老) 여배우와 딸 뻘의 감독은 서로를 그렇게 불렀다. ‘집으로…’(5일 개봉)에서 주인공 외할머니를 맡은 ‘신인 여배우’ 김을분 할머니(78)와 이정향 감독(38). 두 사람은 모녀처럼, 때로는 외할머니와 외손녀처럼 서로에게 익숙해 보였다.
◈할머니, 낮술 마시며 인터뷰 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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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이건 처음 보는 옷이네. 스타 되면 입으려고 그동안 아껴두셨구나?”
생전 처음 사진 촬영을 ‘당하는’ 할머니의 표정이 굳어있자 이감독이 농담을 건넸다. 그래도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사진기자가 디지털 카메라로 즉석에서 사진을 확인시켜 주며“20대처럼 보이십니다”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할머니, 우리 일식집 가서 먹으면서 인터뷰해요. 회 좋아하시잖아.”
이감독의 말에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이감독이 “할머닌 싫다고 다섯 번쯤 말하면 정말 싫으신 거고, 한번만 싫다고 말하면 좋다는 뜻이고, 그냥 가만히 계시면 좋지만 비쌀까봐 걱정하시는 거예요” 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할머니의 ‘진짜’ 손녀 이미영양(25)이 “저보다 우리 할머니를 더 많이 아시네요” 하며 웃는다.
식당에서 이감독은 할머니의 긴장을 풀기 위해 꾀를 냈다.
“우리 맥주도 한잔 해요.”
반 잔 정도 맥주가 들어가자 ‘여배우’의 말문이 비로소 트이기 시작했다.
“아들이 물어봐. 하고 싶으시냐고. 아이고, 하도 들싹거려 놓으니께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했어.” “누더기같은 옷을 입으라고 한 게 싫었지. 분장하고 나가니께 허군(스태프 중 한명)이 괜찮다고 달개드라고(달래더라고).” “시방 생각해도 아찔아찔해. 다 감독 선상이 하라카는대로 벌로(아무렇게나) 한거여.” “극장에선 챙피해 정신이 없었어. 새 사돈까지 다 왔는데.” “아들이 보더니 어무이 고생한 보람 있었다고 하데….”
‘집으로…’는 7세 서울 꼬마가 TV도 없는 산골의 외할머니집에 와 살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영화다. 말을 못하고 눈도 침침한 외할머니를 ‘벙어리’라며 함부로 대하던 철없던 손자가 모든 것을 넉넉히 감싸안는 외할머니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
◈최무룡이 누구여
“제가 찾던 할머니 조건은 세가지였어요. 쪽진 머리를 하고 있을 것, 허리가 굽었을 것, 일곱 살짜리가 ‘만만하게’ 볼 수 있도록 체구가 크지 않을 것.”
이감독은 충북 영동 상촌면 지통마 마을에서 운명처럼 ‘그녀’를 만났다. 극장 하나 없어 영화 보려면 2시간 걸려 대전까지 나와야 하는 마을. 극장에서 ‘활동사진’ 한번 본 적 없고 최무룡, 김지미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할머니.
이감독은 서울에서 식당을 하는 아들에게 먼저 동의를 얻은 후 할머니의 결심을 이끌어냈다.
글을 읽지 못하는 할머니를 위해 이감독은 일일이 한 장면씩 말로 설명하고 연기를 시켰다. 결말을 몰랐던 할머니는 나중에 손자를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완전히 감정에 몰입해 정말 서운해 하며 펑펑 울었다. 할머니의 이런 열연(?) 덕분에 시사회 때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 땅의 외할머니에게 바칩니다
외할머니에 대한 이감독의 느낌은 각별하다. 태어나서부터 2년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36년간을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많은 손녀딸들이 그렇듯, 이감독도 마음속으로는 외할머니를 좋아하면서도 막상 앞에서는 버릇없는 말과 행동을 많이 했다. 이감독 말마따나 “외할머니란 뭐든지 다 받아주실 것 같은 존재니까”.
이 영화 끝에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에게 바칩니다’라는 문구를 넣은 것도 생전 외할머니한테 한번도 말하지 못한 사랑의 표현이다.
인터뷰를 끝내고 할머니를 서울 아들집으로 모셔다 드렸다. 할머니는 영화속에서 손자를 떠나보내는 외할머니처럼, 굽은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한 채 문앞에 서서 ‘감독 선상’과 ‘기자 선상’을 오래오래 배웅했다.
차를 타고도 멀리 서 있는 할머니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던 이감독은 스텝에게 말했다. “일단 차부터 출발시켜. 아니면 할머닌 계속 저렇게 힘들게 서 계신단 말야.”
김을분 할머니는,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였다.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