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품을 생각하면서 나는 ‘10개의 인디언 인형’을 떠올렸고, 그 작품은 애거사 크리스티를, 애거사 크리스티는 영국을 떠올리게 했다. 영국에서 영국 배우들과 함께 촬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영화 ‘고스포드 파크’의 감독 로버트 알트먼의 말이다. ‘플레이어’나 ‘숏컷’ 같은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감독 이름보다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추리소설 작가가 더 익숙할 것이다. 감독의 말대로 영화 ‘고스포드 파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 ‘열 개의 인디언 인형’처럼 밀실추리극의 정통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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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거사 크리스티가 흔히 사용한 소위 ‘장원 살인’의 형식에서는 밀폐된 공간에 갖가지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다. 살인이 일어나고, 그곳에 있던 모두가 피의자가 된다. 그들 모두에겐 그 사람을 죽일 만한 심증이 있고, 탐정의 할 일이란 실제 그를 죽인 이의 물증을 찾아내는 것. 이런 형식이 영화로 넘어오면 ‘Who-dunnit(Who done it) 무비’(제한된 공간의 사람들 중 누가 범인인지 가려내는 영화)가 된다.
영화의 배경은 1932년 영국 교외의 한 별장. 사냥파티를 하기 위해 상류층 인사들이 모이고, 이들의 시중을 드는 하인들도 같은 곳에 머물게 된다. 며칠 동안 수십명의 사람이 저택 안에서 얽히고설켜 생활하지만, 귀족과 하인들의 공간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상류층 귀족들이 위층에서 화려한 파티를 벌이는 동안, 그들의 하녀와 하인들은 아래층 부엌과 복도에 모여 자신의 고용주 서열에 따라 각자의 위치를 뽐낸다. 열심히 일만 하는 하인계급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해 식탁에서 어느 자리에 앉는지가 정해지고 자기 이름 대신 주인의 이름으로 불린다.
화려하게 치장한 손님들이 한가로이 티타임을 갖던 와중에 고스포드 파크의 주인이자 파티 주최자인 윌리엄 매코들 경이 흉기에 찔린 채 시체로 발견된다. 범인을 잡기 위해 형사들이 현장에 나타나지만 그곳에 있던 사람들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범인의 정체는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다.
영화 ‘고스포드 파크’는 애거사 크리스티의 전통을 이어받은 살인 미스터리 위에 인간의 이기심, 탐욕, 속물 근성, 계급적 모순이 겹쳐지면서 로버트 알트먼의 영화 중 최고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02년 아카데미상에서도 감독상, 작품상 등 6개 부문에 걸쳐 후보에 올라 있을 정도로 작품성도 ‘검증된’ 영화다.
그렇다고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읽을 때 같은 흥미진진함이나 심장 박동수가 빨라지는 ‘짜릿함’을 기대한다면 곤란하다. ‘고스포드 파크’는 궁극적으로 전형적인 범인 맞히기 영화와는 다른 길을 걸어간다.
말초적인 흥분을 제공하기엔 영화는 너무 지적이고 우아하며 관찰적이기 때문이다.
범인이 밝혀지는 순간의 통쾌함 같은 건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영화는 30년대 상류층 별장이라는 시·공간 속에서 인간들의 계급적 진실과 그 속에 웅크리고 있는 분노, 복수심, 사랑, 질투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을 차분하면서도 냉정하게 담아낸다.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와 스태프들이 비(非)할리우드적으로 창조해낸 ‘고요한 걸작’이라 할까.
신을진 happyend@donga.com
▼애거사 크리스티▼
영국 출신으로 추리소설의 여왕(1882∼1941). 50여년 동안 80여편의 추리소설을 출간했고 작품마다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성서, 셰익스피어 작품 다음으로 많이 팔렸다고 할 정도.
노처녀 ‘미스 마플’을 통해 사건을 하나하나 풀어가며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하는 작품들로 추리소설 부문에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