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경쟁사인 A주류회사의 제품개발 책임자 C씨(40)를 스카우트한 B사의 인사 담당자는 요즘 얼굴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경쟁사에서 매년 우수제품을 선보이며 B사의 시장점유율을 곤두박질치게 했던 ‘최대의 난적’ C씨를 영입하자마자 돌풍을 일으키는 신제품을 내놓았기 때문.
신제품 시판 후 몇달 만에 양사의 점유율은 비슷해졌고 일부 지역에서는 오히려 B사가 A사를 앞서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C씨의 이적이 B사에는 짜릿한 ‘대박’을, A사에는 처절한 패배를 안긴 것. 당사자인 C씨는 “좋은 조건에서 일한다는 보람과 새로운 도전에 대한 성취감 때문에 예전보다 두세 배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적이 가진 것 중 최고 성능의 무기를 빼앗는 전략은 가장 효과적인 경쟁수단이다. 상대의 전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아군의 전력을 배가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벌이는 경쟁에서도 핵심인력을 뺏고 뺏기는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진다. 경쟁사의 전략과 약점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인재라면 억만금을 주고라도 ‘모셔와야’ 한다는 것이 경영진의 판단이다. 키워서 쓰는 것보다 데려다 쓰는 것이 비용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인식도 확산되는 추세다.
▽핵심인력 스카우트 활발해졌다〓정보기술(IT)분야 전문 헤드헌팅 업체인 드림서어치는 지난해부터 여러 건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대표적인 것이 S사의 모씨를 설득해 경쟁업체인 H사로 보내는 것. 드림서어치는 이 밖에도 대기업인 H기술 영업담당 상무를 A연구소로 스카우트했으며, S기술 부장을 D사 총괄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영입해주기도 했다.
헤드헌팅 업체들은 한 달에 여러 건씩 주요 인력을 경쟁사에 스카우트해준다. 대기업에서부터 중소기업까지 핵심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드림서어치 이병숙 사장은 “매년 수백 건의 핵심인력 스카우트가 성사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경쟁사의 특정 인물을 찍어서 스카우트를 의뢰해 오는 경우도 급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인력 빼오면 만사형통〓스카우트로 가장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은 기술분야. 경쟁사의 신제품 개발이나 주요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쌓아둔 모든 노하우를 곧바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K전자 연구팀 관계자는 “핵심 기술인력이 경쟁사로 가면 주요 기밀이 송두리째 유출될 수 있어 타격이 크다”며 “후발주자가 단시일 안에 기술력을 따라잡는 데도 핵심 기술자를 스카우트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기술인력 외에 기획 마케팅 영업 분야의 인력도 스카우트 대상에 포함된다. 기획 인력의 경우 경쟁사 전체의 전략에 해박하므로 대응전략 마련에 요긴하다는 장점이 있다. 마케팅과 영업 인력은 예전 인맥을 그대로 흡수, 곧바로 두드러진 실적을 내기 때문에 헤드헌터의 공략 대상이 되고 있다.
▽억대 이적 보너스에 연봉 30% 인상은 기본〓지난해까지 LG건설 홍보팀에서 근무하던 김격수 과장(39)은 올해 초 동일토건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실장 직위와 50% 인상된 연봉을 받게 됐다. 이와는 별도로 1억2000만원의 이적 보너스까지 부수입으로 챙겼다.
‘잘 나가는’ 직원이 회사를 옮기는 것은 금전적 이유가 가장 크다. 유니코써어치의 유순신 사장은 “회사 규모가 비슷하더라도 30%가량의 연봉인상은 필수적이며 작은 회사로 옮길 때는 연봉과 직급 외에 별도의 이적 보너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적 보너스는 회사를 옮기는 위험에 대한 일종의 금전적 보상이라는 것.
▽체계적 인력관리의 중요성 부각〓주요기업들은 기술인력 관리를 위해 연봉계약과는 별도로 ‘겸업금지 계약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계약기간이 끝나기 전까지는 경쟁사로 옮길 수 없도록 예방하자는 것. 삼성전자 인사담당 안승준 상무는 “기밀 유출을 막기 위해 해외 선진기업처럼 연구개발 분야 인력과 2∼3년 간 겸업금지 계약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대다수 기업은 아직 이런 예방조치에 신경을 쓰지 않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노동연구원 김환일 박사는 “현행법은 기업간 인력이동에 따른 비밀유출에 대해 제한하지 않고 있어 기업들 사이에 분쟁이 잦다”며 “기업윤리를 고려한 법과 제도의 정비가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드림서어치 이 사장은 “핵심인력은 성취욕이 강하기 때문에 고액연봉으로만 묶어둘 수는 없다”며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도록 회사가 지원하고 명확한 비전을 제시해야 체계적인 인력관리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박정훈기자 sunshad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