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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집으로…', 외할머니 거친 손이 그립습니다

입력 | 2002-04-01 17:35:00


“사랑한다”는 말이 배고프다는 말 만큼 흔해진 시대가 됐지만 영화 ‘집으로…’에서는 ‘사랑’이라는 말이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 역시 사랑을 얘기하기엔 어울리지 않을 듯한 남녀지요. 서울에서 온 일곱살짜리 손자 상우와 산속 시골에 사는 일흔 일곱살의 외할머니가 주인공이니까요. 심지어 할머니는 말을 못하는 ‘벙어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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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집으로…’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않고도, 마음 한구석을 일렁이게 하는 깊고 조용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상우의 외할머니는 우리네 할머니들이 다 그렇듯 ‘사랑한다’는 말을 ‘미안하다’고 합니다. 말 못하는 상우 할머니에게는 ‘미안하다’가 가슴 언저리를 문지르는 것이고요.

철없는 상우가 “게임기 배터리 사게 돈 줘!”하고 떼를 쓸 때도, 닭백숙을 걷어차며 “누가 물에 빠뜨린 닭 달랬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달란 말야!”하며 울 때도, 할머니는 가슴을 문지르기만 합니다.

엄마가 외할머니에게 잠시 맡긴 상우는 ‘도시’를 상징하지요. 상우는 할머니가 손 으로 찢어주는 배추 김치 대신 스팸만 퍼먹고, 물 대신 콜라를 마십니다. 반면 외할머니는 ‘자연’을 나타내지요.

한데, 왜 친할머니가 아닌 외할머니일까요? 같은 할머니지만, 아마 ‘아빠의 엄마’인 친할머니에게서 왠지 당당함을 엿볼 수 있다면,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에게서는 겸손하면서도 꿋꿋함이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도시 문명을 끌어안는 대자연의 힘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리고자 한 이정향 감독이 외할머니를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겠지요.

‘집으로…’는 그동안 잊고 지낸 소중한 사실들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시골 변소가 무서운 어린 손자를 위해 요강 속까지 닦는 외할머니의 거칠고 마디 굵은 손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울 수 있는지도요.

영화를 보면서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요. “비현실적이야. 요즘 저런 할머니가 어딨어.” “자장면 한 그릇을 손자에게만 먹이고 할머니는 엽차만 마신다는 건 상투적이군.”

이런 분들은 영화를 눈으로 보고, 머리로 이해한 분일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마음으로 보는 영화지요. 영화속 외할머니는 누구에게나 있었거나, 혹은 있었으면 하는 마음의 고향 같은 존재입니다.

마지막에 상우는 엄마가 있는 서울로 돌아가지요. 할머니에게 글을 가르쳐주던 상우는 연필 잡는 것조차 서툰 할머니에게 화를 냅니다. “할머닌 말을 못하니까 전화도 못하는데, 편지도 못쓰면 아플 때 어떡해!” 하며 울음을 터뜨리지요. 이 말을 하는 상우는 어느새 한 뼘쯤 자라 있습니다.

이 땅의 외할머니들은, 가진 것 없고, 배우지 못했더라도, 다들 이렇게 손자들을 가르치고 길러주신 게 아닐까요? 처음 왔을 때 할머니를 “벙어리” “벼엉∼신”하며 무시했던 상우는 할머니를 향해 가슴 언저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떠나갑니다.

영화 제목 ‘집으로…’의 말줄임표에는 이처럼 말로는 표현될 수 없는 사랑이, 미안함이, 그리움이 숨어있습니다.

상우의 깜찍한 행동을 보면서 즐겁게 웃다보면 어느새 눈가가 촉촉이 젖어듭니다. 이 영화가 끝나고 ‘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는 감독의 헌사와 마주했을 때, 만약 눈시울이 또다시 뜨거워지며 기억 저 편의 외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다면, 당신은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 외할머니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에….

전체관람가. 5일 개봉.

강수진기자 sjk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