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스카스의 54년 모습(위)과 최근 헝가리대표팀 경기에 앞서 시축을 하고있는 푸스카스.
《월드컵 첫 득점왕인 스타빌레(아르헨티나), ‘드리블의 천재’ 레오니다스(브라질), ‘작은 대포’ 푸스카스(헝가리), ‘축구황제’ 펠레(브라질), ‘폭격기’ 게르트 뮐러(독일), ‘축구신동’ 마라도나(아르헨티나), ‘중원의 마술사’ 지네딘 지단(프랑스)…. 수많은 축구스타가 빛을 발한 ‘꿈의 무대’ 월드컵. 역대 월드컵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그라운드의 별은 누구이며 그들의 활약상은 어땠을까. 월드컵 스타들을 시리즈로 조명해본다.》
1950년대 유럽축구를 대표하는 선수를 꼽으라면 헝가리가 낳은 ‘공포의 왼발’ 페렌 푸스카스(75)를 빼놓을 수 없다.
푸스카스는 유럽 축구의 변방이었던 헝가리에서 1927년 축구선수의 아들로 태어나 16세때 헝가리 키스페스트에 입단했다. 푸스카스는 데뷔 첫해 왼발을 주무기로 무려 50골을 넣으며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고 2년뒤인 18세 때 국가대표로 발탁됐다.
푸스카스를 앞세운 헝가리는 52년 핀란드올림픽에서 우승하는등 승승장구했고 그해 축구종주국을 자부하던 영국 웸블리구장에서 치러진 원정경기에서 6-1로 대승한 뒤 이듬해 헝가리로 불러들여 또 다시 7-1로 대파하며 유럽 최강으로 부상했다. 당시 영국대표팀이 웸블리구장에서 패한 것은 사상 두 번째일 만큼 파란이었다.
이처럼 푸스카스의 가공할 공격력을 앞세운 헝가리가 54년 스위스월드컵에서 우승후보로 꼽힌 것은 당연한 일. 푸스카스는 스위스월드컵 예선 B조 첫 경기에서 월드컵에 처녀 출전한 한국을 맞아 2골을 넣은 등 팀의 9-0 승리를 이끈 뒤 서독전에서도 1골을 챙기며 조 1위로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헝가리는 준준결승에서 만난 브라질전에서 최악의 고비를 맞는다. ‘베른의 난투극’으로 불린 경기장 폭력사건에 휘말린 것. 푸스카스는 이때 당한 부상으로 준결승전(우루과이)에 출전치 못했고 서독과의 결승전에 다리를 절며 출전,팀의 두번째골을 뽑아냈으나 후반들어 내리 3골을 허용하는 바람에 2-3으로 역전패, 월드컵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당시 서독에 패한 것은 헝가리대표팀이 4년만에 맞은 첫 패배였다.
헝가리 축구의 얼굴이던 푸스카스는 56년 공산혁명으로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공산혁명 당시 스페인에서 휴가를 즐기던 푸스카스는 귀국을 포기한 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거쳐 57년 30세에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 정착했고 이후 4차례나 스페인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며 제2의 전성기를 누렸다. 60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는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4골을 터뜨리며 팀의 유러피언컵 5연패를 이끌었다. 이때 얻은 별명이 ‘작은 대포’.
푸스카스는 그러나 35세이던 62년 칠레월드컵에 스페인대표로 출전했으나 무득점으로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는 못했고 이후 레알 마드리드에서 선수생활을 계속하다 66년 은퇴했다.
은퇴 뒤 스페인에서 지도자생활을 계속하던 푸스카스는 94미국월드컵을 앞두고 헝가리대표팀의 임시 감독으로 일하며 고국에 진 빚을 일부나마 값을 수 있었다.
푸스카스는 국가대표팀간 경기(A매치)에 88차례(헝가리 84,스페인 4) 출장, 83골을 터뜨렸고 월드컵에서는 2회 출전에 4골을 기록했다.
김상호기자 hyangs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