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에 산업 분야를 관장하는 부서의 A장관은 “섬유산업은 이제 사양산업”이라고 말했다가 업계의 큰 반발을 샀다. 10여년이 지난 작년, 섬유산업의 수출은 159억9000만달러. 전체 제조업 수출 가운데 10.6%를 차지했다. 세계적으로도 중국 이탈리아 미국 독일 등에 이어 5위의 규모. 사양산업으로 분류됐던 섬유산업은 아직도 당당한 주력산업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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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A장관의 말은 완전한 ‘실언’에 불과했을까. 159억달러라는 화려한 수출실적의 뒷면을 들여다보면 실언 속의 ‘부분적 진실’이 드러난다.
섬유산업 연구원이 자체 평가한 국내 섬유산업의 기술수준은 선진국의 70∼80% 정도. 수출단가는 95년 ㎏당 7.77달러에서 2001년 4.82달러로 하락했다.
거액의 수출 실적과 20∼30%의 기술 격차 및 단가 하락은 섬유산업뿐만 아니라 한국 주력산업의 명암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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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앞날은 주력산업을 사양산업으로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이들 산업의 활력을 높여야 열릴 수 있다. 거기에는 대단한 ‘진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거의 양적 성장에서 도약해 질적 혁신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존 전통산업의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필수적이다.
▽전통 산업, 건재하긴 하지만〓섬유와 함께 대표적 사양산업으로 분류되는 신발산업도 작년 43억달러의 수출실적을 올렸다. 수출 액수도 액수지만 더욱 고무적인 것은 내용이다. 전체 수출액 가운데 8억달러만 완제품이고 나머지 35억달러는 부품소재 분야 제품이었다. 이익률이 낮은 단순가공 생산체제에서 탈피해 상당한 고도화를 이룬 것이다.
신발산업의 예는 국내 전통산업에 한가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내 산업은 신발산업이 이제 막 넘으려 하는 문턱 앞에서 멈칫거리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은 세계시장에서 99년 이후 2년간 연속 1위를 차지한 분야. 작년엔 잠시 호흡을 고르는 사이 일본에 일시적으로 1위 자리를 내주기는 했으나 여전히 세계 최대의 조선국이다.
하지만 그 성적표의 내용은 한국 산업구조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한국의 조선업은 철저히 자본의 양적 투입에 의해 성장해왔다. 막대한 자본을 들여 큰 조선소를 지어놓고 주문을 받아오면 인력을 대거 투입해 배를 만들어내는 단순방식이다. 수주하는 배도 대부분 값이 싼 일반 컨테이너선과 유조선들이다.
이런 방식은 조선업을 주문량은 많지만 이익률은 낮은 ‘박리다매’형으로 고착시켜 왔다. 유럽이나 일본 등은 절대 수주액에서는 한국에 뒤지지만 건조하는 배의 종류가 단순하지 않다. 해저탐사 지질조사선 어선 가공 쇄빙선 천연가스운반선 등 다양하다.
한국이 선진국처럼 다양화를 못하는 것은 한마디로 기초기술의 부족 때문이다. 한 조선업체의 전직 사장은 “특수선을 만들려면 소음 진동 충격 등에 견디는 미세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으니 화물선에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반도체 메모리 부문의 세계 1등도 전문가들 사이에선 ‘불안한 영화(榮華)’로 통한다. 메모리 부문은 생산 노하우가 널리 알려져 있어 후발주자의 추격이 우려되기 때문. 장동식 한누리증권 선임연구원은 “메모리만으로는 언젠가는 따라잡힐 수밖에 없는데도 국내 업체들은 아직 위기감을 덜 느끼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기존산업의 다이내미즘을 살려야〓한국은 단순 조립생산에 강점을 갖고 있다. 자동차산업만 해도 엔진이나 기타 부품을 일일이 개발해서 쓰려고 했으면 아예 발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평가가 많다.
새로운 성장 동력은 이런 강점을 활용하는 바탕 위에서 찾아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원 김재윤 수석연구원은 “한국은 하드웨어에 경쟁력이 있으므로, 그 기반 위에서 소프트웨어를 얹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의 제품을 베끼는 ‘따라가기’ 전략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는 것이다. 기존 강점인 ‘따라하기’에 새로운 것을 얹어야 한다. 하지만 이 대목이 어렵다.
메모리 반도체에서 세계 1위에 올라선 삼성전자의 연구원들은 비메모리 분야인 시스템 LSI 개발에 대해서는 “메모리와는 전혀 별개의 과정이어서 힘들다”고 털어놓고 있다.
일본 기업의 혁신에 대해 연구해온 도쿄대 위정현 전임연구원(경제학)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본 경험이 별로 없는 한국 기업들은 남이 만들어준 것을 베끼는 표준품이 아닌 ‘탈(脫)표준품’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며 “기업의 생산조직 자체가 혁신에 대응할 수 있는 체제로 변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산업연구원 박중구 연구위원은 “한국의 산업구조는 이제 범위의 확장(widening)에서 심화(deepening)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섬유산업은 성장산업〓세계 10대 섬유수출국 가운데 7개국이 선진국이다. 이들이 한국보다 앞선 점은 섬유산업을 독창적인 패션산업이나 정밀화학 기계산업과 연계함으로써 부가가치를 극대화한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그런 싹이 조금씩 보이고는 있다. 섬유산업에서 효성 코오롱 등이 살아남은 이유는 범용제품이 아니라 고기술 제품으로 승부했기 때문이다. 효성은 스판덱스 등 산업용 섬유, 코오롱은 로젤이라는 초극세사 등으로 섬유산업에서 ‘사양’이 아닌 ‘성장산업’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코오롱은 원사 부문의 이익은 거의 안 나지만 초극세사인 로젤로 절반의 이익을 얻는다.
두 업체의 사례는 ‘사양업종은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섬유산업뿐만 아니라 한국 경제의 가능성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
김승진기자 sarafi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