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일본인이고 엄마는 한국인, 나는 어떤 사람이지?
4월에 초등학교 3학년이 되는 내 아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하곤 한다.
응∼, 지구인이지.
우리 부부는 대답이 궁하긴 하지만 이렇게 대답한다. 아들은 알아들은 듯, 못 알아들은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히로’가 된 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지구인’은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白南準)씨가 잘 쓰는 표현이다.
▼´작은이야기´많이 실었으면▼
나는 1980년대 대학원을 다니면서 많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됐다. 몇 사람은 평생친구가 됐고, 그 중 한 명이 아내다.
87년 한국의 민주화선언을 전후한 시절을 돌이켜 보자. 한국과 일본의 거리는 틀림없이 가까워졌고, 일부는 중복되는 부분까지 생겨났다.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 시대는 정말로 바뀌었다.
시대를 바꾸는 커다란 두 가지 흐름은 글로벌화와 정보화다. 그런 흐름을 보며 내가 동아일보에 기대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다.
우선, 세상의 큰 이야기뿐만 아니라 작은 이야기도 좀더 많이 다뤄줬으면 좋겠다. 한일관계에 있어서는 특히 그런 것을 희망하고 있다.
지난해 역사교과서 문제는 극히 심각한 사태였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의 신문은 이 문제를 한국 대 일본이라는 알기 쉬운 도식으로 단순화시켰고, 국회의원이나 중앙관청,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운동단체에만 주목했다는 인상을 나는 갖고 있다. 즉 문제를 국가 차원의 큰 문제로만 취급했다. 그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단순화시켜 큰 틀에서만 취급하면 양국간에 발생하는 숱한 작은 이야기가 누락되거나 보지 못하게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예를 들어 일본의 슈퍼마켓에서 팔리고 있는 비빔밥이나 국밥의 맛은 아주 좋아졌지만, 아직은 일본식이다. 이 상품전략은 일상적인 한일관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많은 한국인 여행자들이 일본 각지의 산을 찾고 있다. 도시에 살고 있는 한국인의 모습은 시골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비칠 것인가. 한일간에 만화영화 ‘도라에몽’을 받아들이는 방법은 어디가 같고, 어디가 틀린가. 자잘한 문제라고 웃어 넘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그런 작은 일 속에 있는 가능성과 새로운 위험성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서 도대체 어디에 한국과 일본의 미래가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한다.
역사와 같은 무거운 문제를 다루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문제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동아일보가 한민족과 한국이라는 국가를 짊어지고 발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에 정말로 한일의 미래를 만들려고 한다면, 일상의 작은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그것을 비춰주는 ‘횃불’의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해 보자. 지역의 노인회에서, 거리의 축구클럽에서, 초등학교의 정보교육에서, 가라오케나 PC방에서,한일간의 교류는 여기저기에서 이뤄지고 있다.
두 번째로, 21세기 사회에서 동아일보라는 신문이 아이덴티티(정체성)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개방해 나가야 한다. 개방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우선 글로벌화가 진전되는 속에서 한국이라든가 일본이라든가 하는 국가의 내부만을 보는 신문사업은 안 된다. 그것은 시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기주의가 되어 버린다. 신문의 바른 모습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국경을 초월해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협력이 가능한 부분은 협력해 나가야 한다.
동아일보와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맹우관계일 것이다. 예를 들어 두 신문이 경영에서부터 보도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분야에서 좀더 연대할 수는 없는지…. 도쿄대학과 서울대학의 미디어 연구부문에서는 본격적인 연대가 시작되고 있다.
다음으로 신문은 앞으로 적극적으로 정보화를 향해 스스로를 개방해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신문정보화의 추진은 방향을 잘못 잡으면 안 된다.
▼글로벌화 대응 자기개혁 필요▼
인터넷을 단순한 정보의 전달수단으로 생각하면 반드시 실패한다. 전달수단이라면 속도가 빠르고, 양만 많으면 되기 때문에 거대한 미디어자본에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신문은 언젠가 거대한 정보산업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신문은 인터넷을 인간공동체를 기르고, 뒷받침하며, 발전시키는 도구로서 사용해야 한다. 인터넷의 전달기능뿐만 아니라 공동체 형성기능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것은 동아일보에 대한 기대인 동시에 다른 모든 신문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21세기 지구인이 될 내 아들을 비롯해 많은 젊은 세대를 위해 나는 내 전문인 미디어론으로 진지하게 한일관계에 매달릴 생각이다. 동아일보가 꼭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우리들의 작은 이야기를 지켜보고, 동시에 뒷받침해 주길 바란다.
미쓰코시 신 도쿄대 대학원 정보학환(學環)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