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조카가 다니는 초등학교의 운동회에 간 일이 있다. 옛날 장터를 방불케하는 떠들썩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학습지 회사와 인근 학원들이 나눠준 풍선이며 만국기 따위가 그런대로 초가을의 흥취를 더했다. 그런데 교단 뒷편으로 장식한 운동회 구호를 보는 순간, 나는 아찔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이제 겨우 초등학교 2학년에 올라가는 조카에게 저 구호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지난달 핀란드전. 황선홍의 짜릿한 두 골로 모처럼 숙면을 취할 기회를 얻었는데 중계방송 직후 이어진 그 방송사의 월드컵 광고가 또한번 내 뒷통수를 때렸다. 해병대의 상륙작전과 국가대표팀의 경기 장면이 교차되면서 사생결단의 투혼, 조국의 부르심을 받은 전사들의 살신성인이 적막한 공기를 뒤흔들었다.
도대체 우리는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일까. 물론 16강은 우리의 목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16강에 사활을 걸기에 월드컵은 너무 큰 잔치다. 장내의 격전도 중요하지만 장외의 잔치판을 풍성하게 만들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그런데 오로지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수준의 투혼만이 지상최대의 작전이 되고 있으니.
더욱이 문화월드컵이라고들 하는데 이 또한 걱정이다. 당장 월드컵 주제가가 어떤 곡인지도 모르겠다. 한국과 일본의 음악인이 모여 ‘이제 함께 모이자’라는 월드컵 ‘공식’ 음반을 냈다는 소식도 있고 지단, 토티, 피구 등이 참여하는 월드컵 ‘공식’ 앨범이 제작된다는 소식도 있다. 어느 방송사는 자체적으로 ‘공식’ 응원가를 만들어 내보내는데 역시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는 식 일색이다.
물론 현재까지 알려진 월드컵 ‘공식’ 주제가는 미국의 ‘인기가수’ 아나스타샤가 부른 ‘붐(boom)’이라는 곡인데, 영 낯설다. 지난 해 말 조 주첨 때 처음 발표되었는데 내 기억으로 이 노래는 월드컵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루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런 까닭인지 각 방송사와 광고회사, 심지어 동네 운동장의 꼬마들에게도 여전히 월드컵 ‘공식’ 주제가는 98년 프랑스월드컵 때 리키 마틴이 부른 ‘더 컵 오브 라이프(La Copa De la Vida)’인 듯하다. “고고고, 알레, 알레, 알레.”
같은 이름의 포르노 사이트 때문에 곤혹을 치른 월드컵 마스코트 ‘아트모’는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아토(ATO), 니크(NIK), 케즈(KAZ)라는 이름의 이 디지털혼성모방사이버우주 동물은 아마 월드컵 역사상 가장 인기없는 마스코트로 꼽힐 것이다.
한일 양국이 개최를 하고 이를 국제축구연맹(FIFA)이 최종적으로 주관한다는 다소 복잡한 공정 때문이라면 차라리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내 생각에 이 초라하고 빈약한, 부분적으로 천박하기까지 한 어이없는 상황들은 하나같이 ‘축구’라는 공통분모를 상실한데 원인이 있다. 축구의 원리, 그 원시적이면서도 정교한 에너지의 미학을 근본으로 삼지 않고 저마다 ‘그럴 듯한’ 단어와 이미지를 주섬주섬 모아서 나열한 결과들 뿐이다.
지난 주, 어느 방송사의 월드컵 프로그램. 아나운서가 축구장에서 월드컵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국민 여러분의 호응’을 독려했다. 마무리 인사가 끝난 후 카메라가 뒤로 빠지는데 아뿔싸, 이 아나운서는 구둣발로 버젓이 잔디 위에 서있는게 아닌가. 프로축구 부천 SK 사령탑이었던 니폼니시 감독은 축구장을, 그 새파란 잔디를 신앙처럼 여겼다. 어떤 경우에도 구둣발로 잔디를 밟지 않았다. 운동복 차림의 선수들이 축구장을 가로질러 라커룸으로 갈 때도 감독 혼자서 그 넓은 운동장을 돌아갔다.
바로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단지 어떤 직업의 일환으로 월드컵을 떠드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축구의 미학과 그라운드의 철학을 신뢰하는 초발심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부끄럽지 않은 16강 염원의 문화 월드컵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윤수의 축구이야기
축구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