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페어플레이의 적들]공익은 뒷전 "우리 몫만"

입력 | 2002-04-03 18:04:00


3일 현재 전국 25개 지역에서 주민의 집단 민원 때문에 생활폐기물 처리시설 건설이 차질을 빚고 있다. 지난해 주민 5명 이상이 함께 관공서에 낸 집단 민원은 1만5926건으로 2000년보다 5.5% 늘었다. ‘집단이기주의’를 말할 때 흔히 원용되는 지표들이다.

우리 사회가 집단이기주의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집단간의 막무가내식 싸움으로 애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보거나 집단의 반발로 국가의 정책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는 경우도 많이 생기고 있다.

▽님비현상〓쓰레기처리장이나 화장장, 장애인학교 등 이른바 기피시설이 들어서는 것을 거부하는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 현상은 대표적인 집단이기주의로 꼽힌다.

그러나 그 속사정은 사안마다 다르다. 전문가들은 님비현상 그 자체도 문제지만 님비현상을 유발하거나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행정 실패’가 더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서울시가 추진하고 있는 서초구 원지동 추모공원 건립 사업이 이런 경우.

화장장과 납골당을 세우는 이 사업에 2년째 반대하고 있는 현지 주민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에 화장장이 들어서는 것을 우리 아닌 남이 결정했고 우리는 결정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됐다”며 노여움을 나타내고 있다.

반면 서울 강남구 일원동에 있는 정서장애인학교인 ‘밀알학교’의 경우 편견과 오해가 집단행동을 불러온 대표적인 경우다. 당시 주민은 학교가 들어서면 아파트 가격이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공사를 방해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내는 등 실력행사로 맞섰다. 그러나 학교가 들어서고 난 뒤에도 집값이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일원동의 집값은 대치동 다음으로 많이 올랐다.

이 밖에 경기도의 종합장묘단지 조성 계획, 경북 성주군의 쓰레기매립장 건설 계획 등은 이해당사자들의 이해관계 대립으로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정부가 1989년부터 추진해온 원자력 발전소 및 핵폐기물 처리장 건립 계획은 국가적 대사(大事)지만 지역 주민 및 환경단체 등과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아 아직 부지 선정을 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정부는 당초 경북 영덕군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건설하려 했지만 주민이 어업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1990년 11월에는 충남 태안군 안면도를 부지로 선정하려 했지만 내부 계획이 사전에 유출되는 바람에 주민의 반대가 심해 백지화됐다.

1991년에는 강원 고성 양양, 경북 울진 영일, 안면도, 전남 장흥 등 6곳의 후보지를 선정했다가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의 반발을 샀고 1995년에는 인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를 핵폐기장으로 지정고시했다가 활성단층이 발견되는 바람에 백지화했다.

정부는 하는 수 없이 2000년 6월 27일 거액의 ‘개발금’을 내걸고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유치지역 공모에 나섰으나 시한을 한 차례 연장한 지난해 6월까지 한 곳도 신청하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동명기술공단에 부지 선정 용역을 의뢰, 8월 결과가 나오면 교섭에 나서 내년 초까지 부지 선정을 마무리할 계획이지만 이 역시 쉽지 않을 것이란 게 관계자의 설명이다.

▽집단이기주의 논란〓서울대 행정대학원 이달곤(李達坤) 교수는 ‘어떤 사회의 개개 집단이 공익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최대 가치로 보고 사익을 극대화하려고 투쟁하는 것’을 집단이기주의라고 정의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임희섭(林熺燮) 교수는 “집단이기주의가 문제로 부각되는 이유는 집단의 이익추구 행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임 교수는 그 예로 △이익을 주장하면서도 책임은 무시하는 경향 △자신의 이익은 주장하지만 타인의 이익은 존중하지 않는 배타성 △공익보다 사익을 앞세우는 경향 △이익을 주장하는 절차와 방법의 비민주성과 비합리성 등을 꼽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이나 집단이 사익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공익’에 대한 정의는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다를 수 있어 집단이기주의 규정의 절대적인 기준은 없다는 게 지배적인 견해다.

또 집단이기주의는 종종 상대방을 공격하고 비방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조희연(趙喜a) 교수는 “공익의 기준이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집단의 행동을 ‘집단이기주의적’ 행동으로 규정할 때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며 “민주주의는 집단간의 이견과 갈등을 끊임없이 조화하고 타협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해결책은 없나〓님비현상에 대해서는 주민을 참여시키는 투명한 행정, 피해의 공평분담, 확실한 보상 등의 해결 방식이 제시되고 있다.

그 예로 경기 안성시는 2000년 ‘1개 마을, 1개 혐오시설’이라는 공평부담의 원칙에 대해 주민 동의를 얻어냈다. 또 전남 강진군은 쓰레기처리장을 유치하는 마을에 일시불 20억원 등 수십억원의 보상을 하겠다고 약속해 현재 3개 군이 유치 경합을 벌이고 있다.

각종 직능단체의 집단이기주의적 행동에 대해 전문가들은 집단 이익의 충돌과 갈등을 해결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으며 명백한 공익을 사익보다 우선하는 시민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숙명여대 법대 이영란(李榮蘭) 교수는 “집단이익을 추구하고 집단행동을 하는 경우에도 법과 윤리를 지키며 제3자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하는 문화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신석호기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