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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플레이의 적들]지식과 땀을 도둑질한다

입력 | 2002-04-04 18:11:00


한국 사회의 ‘베끼기’는 고질이나 다름없다.

학계의 논문 무단 도용과 방송계의 프로그램 표절은 물론이고 상품의 디자인 영역에서도 베끼기가 판치고 있다. 문화 예술 학술 방송 대중문화 컴퓨터소프트웨어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남의 것 훔치기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여행업계조차 새 상품이 나오기가 무섭게 ‘닮은꼴’ 상품을 쏟아내고 있다.

한국의 표절 불감증은 단순한 우려의 수준을 넘어 엄청난 문화산업적 손실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세계적으로 지적재산권 보호를 강화하고 있는 추세를 감안할 때 국내의 베끼기 관행은 다른 국가와의 마찰을 빚을 수 있다는 점에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지난해 대학원을 졸업한 이모씨(28)는 자신이 90% 이상 번역한 책을 그대로 출판한 교수가 번역상을 받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씨는 “일부 교수들은 대학원 수업에서 사용하는 원서를 학생들에게 번역시킨 뒤 약간 교정해서 자신의 번역서로 둔갑시키곤 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 제자나 동료 학자가 쓴 논문을 무단 도용하거나 외국 논문을 베끼는 것은 거의 관행화되다시피 했다. 지난해 11월에는 국내 유명 대학의 세 교수가 공동으로 쓴 논문이 표절로 밝혀져 국제학회로부터 망신을 당했으며 올해 2월에는 학회지와 교내 논문집에 실린 대학원생 논문을 표절해 물의를 빚은 대구대 C교수가 면직되기도 했다.

대학에서 표절이 끊이지 않는 것은 교수와 제자 사이의 ‘도제 시스팀’ 때문이라는 것이 공통된 지적. 교수가 제자의 앞날을 ‘쥐고’ 있기 때문에 제자들은 논문을 도용당하거나 번역자의 이름을 바꿔도 속병만 앓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최근에는 교수 업적 평가의 가장 중요한 잣대가 ‘논문 수’라는 점도 교수들을 표절의 유혹으로 몰아넣는 요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교수 연구 업적에 대한 질적 평가보다 양적 잣대가 중시됨으로써 교수들이 표절을 해서라도 논문 수를 늘리려 한다는 것이다.

대중문화계의 표절은 드라마 광고 영화 가요 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만연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MBC 주말극 ‘여우와 솜사탕’이 작가 김수현씨의 ‘사랑이 뭐길래’를 표절했다고 법원이 결정을 내린 것을 들 수 있다.

국내 방송계의 프로그램 베끼기 시비는 끊이지 않는다. 국내 대중음악 평론가와 영화평론가 등이 쓴 ‘일본 대중 문화 베끼기’(나무와 숲·1999)는 지난 30년간 한국이 일본 대중문화를 어떻게 수용해 왔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희대 영문학과 도정일(都正一) 교수는 이 책에서 “우리 사회가 일본의 대중문화에 취해 온 태도는 이중성과 위선 그 자체다. 매체 종사자들의 파렴치한 베끼기에 의해 시장은 이미 잠식될 대로 잠식돼 있고 그것은 지난 30년간 한국 대중문화의 생산력을 옭아매고 창의력을 질식시키는 데 크게 작용했다”고 밝혔다.

가요의 경우도 90년대 중반 톱가수였던 ‘룰라’가 표절했다가 된서리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도 특정 노래에 대한 표절 시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IT 분야의 고전적 표절은 소프트웨어 불법복제.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불법복제 대상물이 컴퓨터 소프트웨어뿐만 아니라 인터넷 콘텐츠, 게임, 멀티미디어 파일, 데이터베이스(DB)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거에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법복제가 판쳤으나 단속이 강화된 요즘에는 소규모, 개인화하고 있는 것이 특징.

서울 영등포에서 PC방을 운영하는 A사장은 지난해 손님 중 한 명이 ‘온라인 게임을 하려는데 서버에 접속이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나타내 처음엔 대수롭지 않은 시스템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원인을 분석한 결과 온라인 게임을 처음 설치할 때 정품 패키지에 포함돼 있는 CD 인증번호(CD 키)를 누군가 불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고 말았다.

게임마니아 P씨는 지난해 서울 용산에서 조립 PC 한 대를 샀다. 자신이 원하는 고(高)사양을 선택해도 속칭 메이커 PC보다는 가격이 쌌다. 하지만 정작 P씨의 계산은 다른 데 있었다. PC 조립상을 제대로만 선택하면 보너스로 엄청난 양의 게임을 하드에 불법으로 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P씨는 “용산에서 조립 PC를 살 때 운영체제인 윈도 XP를 버젓이 복제품으로 주면서 값을 싸게 해주고 그 대신 마이크로소프트사에 고객 등록을 하지 말라고 주의를 줄 정도”라고 전했다.

창업분야에도 따라하기가 거세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실내 서바이벌 경기장, 실내 사격장, 다트 게임장 등에 손님이 몰리자 같은 가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3년 전 여름에는 ‘조개구이’라는 이름으로 서울 시내에 수백개의 점포가 생겨 음식점 창업시장을 강타했지만 대부분 두세 달도 안 돼 문을 닫았다.

주식투자도 따라하기 식이 많다. 주가가 오르면 ‘족집게 주식 과외’가 극성을 부리는 것이 대표적 사례.

‘투자설명회’ ‘증권세미나’ ‘주식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서울 강남과 여의도 일대 20∼30곳에서 열리는 주식과외는 남이 하니까 나도 하겠다는 따라하기 투자의 전형을 보여준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

[사과문]4월5일자 A8면에 보도된 ‘페어플레이의 적들’

본보 4월5일자 A8면에 보도된 ‘페어플레이의 적들’ 제하의 연재물 중 ‘지식과 땀을 도둑질한다’의 보조상자 기사는 저자인 이진씨와 관계없이 게재됐습니다. 이 기사는 기고문 형식으로 실렸으나 실제로는 1997년 발간된 저자의 ‘미국에 관한 진실 77가지’(문예당) 중 연재물 기획 취지에 부합한다고 판단된 부분을 축약해 게재한 것입니다. 당시 저자의 연락처가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출판사의 사전 양해를 받았습니다. 동아일보사는 지적재산권을 앞장 서 보호해야 할 언론사로서 이를 소홀히 한 점에 대해 애독자 여러분께 사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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