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 사람이든 기나긴 역사의 곡절 속에서 풀지 못한 한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매번 피로 갚을 수는 없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축구장은 그 한을 잠시 풀어주는 공간이다. 문제는 그 대상이 같은 나라의 다른 지역일 경우다.
우리의 경우 이 문제는 현대사의 상처로 남아있다. 정치 경제는 물론 결혼이나 취직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 지역차별은 큰 부작용을 낳고 있다. 악의적인 지역차별 정책으로 같은 피가 흐르는 동일한 국민을 편갈라 싸우게 한 정치집단을 비판하는 것으로는 역부족인 듯싶다. 우리 스스로, 시민사회의 성숙한 힘으로 극복해야할 과제가 지역주의다.
사실 이 지역주의는 지도상의 모든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스페인이 대표적이다. 스페인은 마드리드를 근거로 하는 카를로스 왕조와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하는 카탈루냐 세력, 그리고 북부 빌바오를 요새로 삼는 바스크족 분리독립파로 나뉜다. 이 견고한 지역주의 때문에 스페인 축구는 발전해왔고 동시에 침체되었다.
스페인의 월드컵 전적은 명성에 비해 초라하다. 월드컵 4강 보다는 다른 지역 팀을 홈구장에서 꺾는 것이 그들의 숙원인 탓이다. 가령 빌바오를 연고로 하는 아틀레틱 빌바오 팀은 외국인 선수는 물론 바스크족 출신자만 선발한다. 대표팀 구성도 애를 먹는다. 출신지에 따라 선수 선발을 안배해야 하며 간신히 엔트리를 확정해 놓으면 합숙 과정에서 치고박는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당시에는 바스크족 출신의 클레멘테 감독이 주전선수 대부분을 바스크족 출신으로 선발하는 바람에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그때 우리 대표팀은 2-2로 비기는 ‘이변아닌 이변’을 일으켰다.
영국도 지역주의가 팽배해있다. 대영제국에 맞서 ‘지금도’ 독립운동의 피냄새가 마를 날이 없는 북아일랜드는 물론이고 스코틀랜드와 웨일스 지역 또한 축구 전쟁의 열기는 식지 않는다. 특히 스코틀랜드대표팀을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타탄 아미’, 즉 ‘타탄의 군대’ 응원단은 ‘울트라 닛폰’이나 ‘붉은 악마’에서는 맛보기 힘든 아주 강렬하고 저항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들은 압제자 영국에 맞서 저항했던 조상들의 독립투혼을 축구장에서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지역주의가 뚜렷하다. 이 두 나라는 공통적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와 농업 중심의 남부로 구분되며 지난 수세기 동안 북부가 정치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해왔다. 그 까닭에 명문 클럽도 북부에 더 많이 몰려 있고 이에 남부의 축구팬들은 단순한 승부내기 이상의 감정을 축구장에 쏟는다.
지난 주말, 전주에서 열린 아디다스컵 전북-부천의 경기. 우리 축구의 부정적인 측면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비가 온 탓도 있지만 관중석은 텅 비었다. 배수가 되지 않은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은 신경질적인 전투축구를 벌였다. 세련된 조직 플레이보다는 우격다짐의 밀어붙이기만이 유일한 작전이었다. 조윤환 감독과 몇몇 주전 선수가 부천에서 전북으로 옮긴 것이 감정의 앙금이 되었다. 이 불바다에 심판의 석연치않는 판정이 기름을 부었다. 양 팀의 선수와 서포터스는 야유를 넘어서 욕설을 퍼부어댔고 육박전 직전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이건 지역주의도 그 무엇도 아니다. 경기의 내용은 물론 승패조차 아랑곳 하지 않는 험악한 복수혈전. 물론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응원문화가 있을 수 있다. 길들여질 수 없는 거친 에너지를 축구장에서 배설하는 쾌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아리랑 목동’ 같은 응원을 위한 응원이 필요 없듯이 패싸움을 방불케하는 폭력 또한 누구도 원치 않는다. 아마 당사자들 역시 야유와 욕설의 차이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종이 한 장 차이를 엄격히 지키면서 그 범위 내에서 가능한 모든 에너지를 분출하는 응원, 그것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 그것은 지역주의의 폐악을 없애는 시민 사회의 연습이기도 하다.
축구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