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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파이낸스센터 서울 속 ‘작은 월街’

입력 | 2002-04-10 17:44:00


사람에 비유한다면 운명이 기구했다고나 할까.

태어나기까지 무려 18년의 산고(産苦)가 있었고 한때 ‘귀신이 붙었다’는 억울한 누명까지 썼다. 지금의 화려한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시절은 너무도 길었다.

서울 중구 무교동의 서울파이낸스센터 빌딩.

지하 8층 지상 30층의 이 최첨단 빌딩은 “한국 경제와 부침(浮沈)을 함께 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세워졌다.

‘한국에서 가장 임대료가 비싼 빌딩, 외제 자재로 지은 호텔 같은 오피스 빌딩, 화려한 면면의 입주 회사들, 주변 상권의 핵심으로 뜬 고급 아케이드….’

지금 이 빌딩에 따라붙는 화려한 수식어들이 무색할 정도로 ‘과거’는 복잡하다. 현대건설이 땅을 파고, 두산건설이 25층까지 철골만 올린 뒤 공사가 중단됐으며, 태흥건설이 짓다가 부도를 냈고 외국에 팔린 뒤 다시 태흥건설이 마무리했다.

서울 광화문의 명물로 등장한 서울파이낸스센터의 어제와 오늘.

▽운명의 시작〓80년대 초 유진관광(사장 곽유지)은 88올림픽을 겨냥해 이 자리에 특급 호텔을 세우기로 계획했다. 84년 사업시행 인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공사는 3년 뒤인 87년 세계적 호텔체인인 샹그리라 호텔과 합작 계약까지 할 정도로 잘 진행됐다.

하지만 설계변경 등으로 공사는 더디게 진행됐다. 그러다가 90년 시유지인 무교공원 지하에 건축허가 없이 주차장을 지으려다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준 사실이 들통나면서 공사는 무기한 중단됐다. 당시 봇물처럼 터져 나온 각종 건축관련 비리 가운데 대표적 사례였다.

이후 4년 남짓 내팽개쳐져 ‘광화문의 흉물(凶物)’로 불리던 이 빌딩은 93년 롯데관광 김기병(金基炳·62) 회장이 유진관광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최고’만 사용한 건축〓김 회장은 이곳에 호텔 대신 업무용 빌딩을 짓기로 하고 업무시설로 재인가를 받은 뒤 빌딩 이름을 ‘서울파이낸스센터’라고 지었다. 선진국의 금융빌딩을 모델로 서울 한복판에 한국 금융의 대표 건물을 짓겠다는 컨셉트였다.

김 회장은 이 빌딩 건축에 그야말로 심혈을 기울였다. 25층까지 올라갔던 철골 구조물 중 9층 이상을 모두 뜯어내고 다시 올렸으며 최고의 설계와 최고의 자재 등 모든 부문에 ‘최고’만을 고집했다.

당시 공사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스페인 화강암, 일본 알루미늄 섀시, 프랑스 벽지, 이탈리아 대리석 등 최고급 건축자재들만 사용했다”면서 “내진 설계나 대형 컨벤션센터 등 새로운 개념의 오피스 빌딩으로 설계해 설계비도 많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김 회장은 이 빌딩을 한국 최고의 건물로 만들겠다는 열망이 대단했다”면서 “별 수 없이 팔아넘긴 뒤에도 미련이 남아 이 빌딩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새로운 운명과의 만남〓김 회장은 당초 이 빌딩을 지금보다 8층 높은 38층으로 계획했다. 모든 자재를 38층 분량에 맞췄고 현재 로비에 있는 빌딩모형도 38층으로 제작했다.

하지만 이 꿈은 무산됐다. 2년 가까이 ‘고도제한’이 풀리기를 기다렸지만, 결국 30층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때문에 공기(工期)가 늦춰져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 충격파를 더 견디지 못했다는 분석도 있다.

‘IMF 태풍’은 갑자기 닥쳐왔다. 1∼5층에 입주키로 한 동화은행이 98년 6월 퇴출되면서 유진관광도 마침내 부도를 냈다. 당시 공정은 90%로 일부 층은 내부 인테리어까지 마친 상태였다.

고도제한이 풀리기를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빌딩 주인이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관계자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비어 있는 상태로 2년을 보낸 뒤 2000년 4월 이 빌딩은 싱가포르 투자청에 매각되면서 ‘긴 여정’을 마쳤다.

당시 주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의 송병학 차장은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최고급 빌딩이 외국 자본에 매각된다는 게 가슴 아팠으나 국내에는 이 빌딩을 살 만한 곳이 없었다”고 말했다.

▽화려한 변신〓그 뒤 만 2년. 이 빌딩은 눈부시게 부활했다. 2년 전 4550억원이던 빌딩 가격은 현재 7000억원 수준. 임대료 역시 서울에서 가장 비싸다는 광화문 주변의 다른 빌딩보다 20∼30% 높은 한국 최고 수준이다.

입주 회사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다국적 금융회사 등 금융관련 기업이 전체의 45%, 외국계 컨설팅 회사가 16%, 대사관 대기업 국내 금융기관 등이 나머지를 차지하고 있다. 외국계 금융회사들이 많이 입주한 교보빌딩 영풍빌딩 흥국생명 빌딩과 함께 광화문이 여의도와 더불어 한국의 또 다른 ‘월가’로 불리는 데에는 이 빌딩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발레 파킹 등 호텔 수준의 서비스와 첨단 인텔리전트 시설을 자랑한다. 지하에 고급 레스토랑들이 모인 아케이드는 광화문의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빌딩 관리를 맡은 코리아에셋 어드바이저스(KAA) 전경돈 마케팅팀장은 “불과 2년 전만 해도 콘크리트 먼지만 날리던 음침한 빌딩이었다”면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화려한 변신”이라고 말했다.

이헌진기자 mungchi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