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별’이 아니라 ‘감사’ 미사입니다. 우리 교구의 모든 신부와 수도자, 신자들게 감사합니다. 나 혼자 하지도 않았고 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25일 은퇴하는 한국 가톨릭의 마지막 외국인 교구장 나길모 인천교구장(사진)은 5월 미국으로 가기 전 예정된 미사들의 명칭을 ‘송별’이 아니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한국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1954년 7월22일. 낯선 부산 땅을 처음 밟은 28세 벽안의 청년 선교사는 그의 표현을 빌리면 ‘몸이 낡고 늙은’ 70대 노인이 됐다.
그는 54년부터 청주 교구에서 본당 보좌, 주임 신부 등을 거쳐 61년 35세 때 초대 인천 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65년 인천 명예시민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41년간 교구장을 지낸 것은 한국 가톨릭 사상 가장 긴 교구장 재임 기록이다.
본명이 윌리엄 존 맥나호튼인 그는 1926년 미국 메사추세추주 로렌스시에서 독실한 가톨릭 가정의 5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교 졸업뒤 ‘메리놀외방선교회’에 입교했고 53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사제 서품 5주전 한국으로 가라는 통보를 받았다”면서 “50년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지만 사실 내가 가야 할 나라에 대한 예비지식은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장장 48년간 한국 가톨릭 교회를 지켜온 그의 감회는 남다르다.
“50년대에는 하루 두끼 밖에 먹을 수 없었던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끼니를 때우기 위해 빨리 영세받으려는 사람들에게 ‘구호물자 신자’ ‘밀가루 신자’가 되면 안된다고 자주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하지만 배는 고팠지만 공동체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서로 돕던 아름다운 모습들이 생생합니다.”
나 주교가 부임할 당시 인천 교구의 본당은 9개, 신자는 2만여명이었지만 지금은 본당 85개, 신자 36만여명에 이른다. 나 주교의 미국 고향에 있던 성당은 세곳에서 현재 한곳으로 줄었다.
“한국 사회와 교회의 눈부신 성장 뒤에는 세속화, 물질주의, 개인주의 등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이를 경계해야 합니다. 또 이제는 한국 선교사들이 거꾸로 유럽과 미국으로 가야할 때가 됐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부와 신자가 줄어 어려움이 많습니다.”
나 주교는 “61년 주교 서품 뒤 62년부터 65년까지 한국 주교단 일원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해 교회 변화 쇄신의 커다란 물줄기가 된 현장에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면서 “그후 바티칸공의회 결정에 의해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기쁨이었다”고 말했다.
“전 ‘만두 중독자’예요(웃음). 만두 생각이 많이 날 겁니다. 저는 50여명의 ‘손자’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그곳 지역 본당과 보스턴 교구 일을 도울 것입니다. 2년뒤 ‘피정(避靜)’을 맞으면 꼭 한국에 다시 올 생각입니다.”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