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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버타운 24시(하)]"편하고 재미있지만 자식 그리워"

입력 | 2002-04-16 16:26:00

간병인 도움을 받아 아침식사하고 있는 최의식씨부부


‘뎅뎅뎅….’

오전 6시. 미리내 실버타운 ‘유무상통(有無相通) 마을’의 아침은 어르신들이 삼종기도를 위해 치는 범종소리로 시작된다. 서울에 사는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토요일은 설렘 속에서 오전 7시 미사나 산책을 준비한다.

▽치매〓 미사가 끝난 뒤 최의식씨(84)는 치매에 걸린 아내 곽은수씨(76)를 피아노 앞에 앉혀본다. “곽 선생. 당신이 좋아하는 피아노예요.”

이화여대 음대학장을 지낸 곽씨는 1960∼70년대 우리 피아노계의 기수로 활동한 인물. 3개월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던 그가 요즘엔 가끔 건반 위에 손을 올려 놓아 남편을 기쁘게 한다.

치매로 기억을 상실해 가는 영국 철학자 아이리스 머독과 항상 머독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남편 존 베일리를 그린 영화 ‘아이리스’의 한 장면 같다.

한복을 차려입은 무용 '교습생'들

이들은 지난달 19일 신학생 장학금으로 천주교 수원교구에 1억8000만원을 기탁했다. 최씨는 “헛 살았다”고 한숨을 내쉰 뒤 “이렇게 봉사하며 살고 있는데…”라고 덧붙인다.

가벼운 치매에 걸린 어르신도 있다. 남자 얘기라면 질색인 김모씨, 아직까지 일본어를 구사하는 일본 도쿄여고 출신 황모씨, 자신의 방 호수를 자꾸 물어보는 신모씨 모두 정다운 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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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리면 젊었을 때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며 “‘당신의 미래’라는 생각에서 서로 따뜻하게 대하고 있다”고 김성식 간호사는 전했다. 실버타운이 노령화되면 치매 어르신이 늘어나기 때문에 치매실 2곳을 확보하고 있다.

▽오순도순 사는 얘기〓 물리치료실에 비상이 걸렸다. 오규택 실장이 배가 아프다며 10분 늦게 문을 열자 ‘다리가 아파 한숨도 못 잤다’는 어르신들이 동동 발을 구른 것.

한 할머니는 미안한 듯“오늘은 쉬실 걸 그랬어요”하면서도 “침대가 하나 남는데 5○○호 부를까”라며 딴 사람까지 챙긴다.

“얘들이 버렸다”고 울고 다니는 할아버지(81)와 밥도 많이 먹어줬다는 양옥례씨(70). 그는 “들어올 땐 속세를 떠난다는 생각에 우울했다”고 회상했다.

물리치료실의 오규택실장

“첫날, 강원도 대관령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는 아들 녀석에게 실버타운에 있다고 전화했더니 지 에미 늙은 것은 모르고 ‘예, 어머니. 봉사하러 가셨군요’ 하대요. 하긴 힘 있을 때 남을 도와야 나중에 도움도 받지요. 그래서 전화도 받고 심부름도 해요.”

남편과 함께 이곳에 온 박정희씨(70)는 “같이 살다 죽는 것보다 떨어져 있다 가면 자손들이 덜 슬퍼할 것 같다”며 오히려 아이들 걱정이다.

이곳은 공기가 좋아 한두달 있으면 호흡이 편안해진다고. 머리가 하얗게 센 최종임씨(70)는 요즘 뒤쪽부터 까만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자식이 그리워〓 서울 신촌에서 온 조민자씨(73)는 혼자 살면서 우울증이 걸릴 것 같았다. 그래도 미국과 중국에 사는 아들들과 사업가의 아내인 딸이 자랑스럽다. 그는 “딸이 바빠 자주 못오지만 여기 친구가 있어 즐겁다”고 말한다.

체신부 공무원 출신인 이동하씨(79)는 5년전부터 자꾸 같은 질문을 하는 아내(75)가 걱정스러운 표정. 아들 집에서 살다 여기 왔을 땐 아이들이 보고 싶어 일주일에 두 번씩 서울에 갔다. 아이들을 도와 주진 못하고 금방 돌아 나오는데 버스에 오르자마자 아내는 업어키운 손자가 보고 싶단다.

“아들 녀석에게 한번 내려오라 말하고 싶어도 일에 시달려 일요일에도 하루종일 잠을 자는 것을 생각하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싸 들고 오는 옆방 어르신의 음식을 매번 얻어 먹기가 미안해 짐짓 누구를 기다리는 체 하며 현관 앞을 서성거리는 어르신들. 이날 오후 가족이 도착했다는 관리실의 전갈를 받고 신발도 신지 않고 달려나가는 김태용씨를 보면서 기자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원장 방상복 신부(54·사진 오른쪽)는〓개량한복에 까까머리와 긴 수염이 스님 같다. 그의 관심은 ‘그리스도교와 불교간의 대화와 화해, 일치를 위한 연구’(동국대)와 ‘천주교 노인복지사업 개발에 관한 연구’(경기대)란논문에서 드러난다.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 중 말라리아에 걸려 청력이 약한 편. 어르신들과 큰 소리로 대화한다. 10여년 전 경기 광주시 도척성당 주임 신부시절 무의탁 어르신을 한분 두분 사제관으로 모셔 돌봤고 사제관이 비좁아 살 곳을 마련해 드린 것이 ‘작은 안나의 집’. 10년간 이 집을 운영하며 얻은 노하우로 유료 실버타운을 열게 됐다.

안성시내에 또다시 무의탁 어르신 시설을 건립 중. 실버타운의 성공비결은 투명한 경영.

이곳의 모토는 ‘놓아라’. 그는 “어느 어르신들 방에 들어가면 가구가 주인이고 사람이 손님같은 경우가 있는데 아직 놓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나이가 들수록 잘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031-672-0813

안성〓김진경 기자 kjk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