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PD노트]이해관계 첨예한 다큐 툭하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

입력 | 2002-04-17 18:09:00


거짓말을 조금 보태자면 다큐 프로그램의 책임프로듀서가 된 후부터 방송국에 있는 시간보다 법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민감한 사안을 다루다 보니 툭하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1월 11일 방영된 신년다큐 ‘잘 먹고 잘 사는 법’도 예외는 아니었다. 방영을 하루 앞둔 10일 오전 우유와 육류 생산농민단체들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을서울지법 남부지원에 제출했다.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S판사는 깐깐하기로 방송가에 소문이 자자했다. 그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여 몇몇 프로가 불방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황을 잘 몰랐던 나는 방송대본 외에 변변한 자료를 제출하지 못한데다 선임 절차를 마치지도 않은 자문 변호사를 동행하는 실수를 범했다. 판사의 얼굴이 굳어졌고 ‘아차’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뒤늦게 자료를 추가 제출하기 위해 판사실에 다시 들렀다. 아까보다 훨씬 공손한(?)태도를 보였더니 잠시 앉을 것을 권했다. 이어 그의 대중매체론이 시작됐고 데미안과 아프락사스를 들먹이는 문학강의로 연결됐다. 30분쯤 지났을까. 동행했던 작가가 진지한 말투로 “진실만을 전달하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그 말이 판사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잘 먹고 잘 사는 법’은 무사히 방송됐다.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S판사실에 ‘불려’간 것은 불과 3주 뒤였다.

이번에는 인권학원 분규를 다룬 ‘그것이 알고싶다-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한 죄’에 대해 재단측이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한 것. S판사는 3개월 뒤로 방송을 연기하자는 중재안을 내놓았지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떤 결정이 나든 따르겠다”고 배짱(?)을 부렸고 익숙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는 S판사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결국 가처분 신청은 기각됐다. 나는 정말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았다. 아니,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랐다.

3월 14일 나는 또 다시 남부지원 법정에 섰다. 340일간 계속된 인권학원 분규를 총정리하는 ‘그것이 알고싶다-봄을 빼앗긴 아이들’에 대해 재단측이 또 방송금지 가처분신청을 냈다. 같은 사안을 다룬 프로에 대해 다른 판결을 내리기란 쉽지 않을 거란 생각에 일단 안심이 됐다. 그러나 기대는 판사들이 법정에 들어서는 순간 산산조각났다. 담당 판사가 바뀐 것이다. 다행히 이번에도 가처분신청은 기각됐으나 데미안을 꿈꾸던 S판사가 그토록 그리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신언훈SBS ‘그것이 알고싶다’ 책임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