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을 중도포기한 이인제(李仁濟) 고문은 불과 1개월 전만 해도 가장 유력한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꼽히며 ‘대세론’을 구가했다.
여론조사에서도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전 총재와 10%포인트 이내에서 선두 다툼을 벌여왔다.
97년 대선에서 단기필마로 ‘이인제 돌풍’을 일으키며 492만표(19.2%)를 얻었던 득표력과 98년 8월 국민회의에 합류한 이후 동교동계 구파로부터 받았던 전폭적 지원이 힘의 원천이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여권의 ‘황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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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노무현(盧武鉉) 돌풍’에 휘말려 허망하게 좌초한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도 대세론에 안주해 시대의 큰 흐름과 변화를 제대로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 패인으로 꼽힌다.
이 고문의 한 측근은 “전략 부재에다 캠프 내에 팽배한 무사안일주의와 불협화음이 패인이었다”고 털어놨다. 대세론에 발등을 찍혔다는 얘기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인 오픈소사이어티의 김행(金杏) 대표는 “민주당 경선 이전까지의 여론조사를 보면 이 전 총재와 이 고문이 선두그룹이었지만 단순지지도는 20%를 넘지 못했다”며 “뉴 페이스를 찾고 있던 나머지 80%에게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이 후보의 한계였다”고 분석했다.
당 관계자들은 국민경선제 도입 등 정치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에서 조직과 세에 의존하는 과거의 선거운동 방식에 의존했던 것도 패인으로 지적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노 후보에게 본선경쟁력이 뒤지는 것으로 나오자 이를 만회하기 위해 네거티브 공세에 치중하는 바람에 더더욱 선거인단이 등을 돌렸다는 지적도 많다.
김정훈기자 jng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