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獨學)으로 독보(獨步)에 오른 장인(匠人).’
거문고 연주자 겸 작곡가인 정대석씨(53·KBS 국악 관현악단 단원·사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는 가야금의 황병기 선생과 함께 국악계에서 직접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전천후 국악인’으로 손꼽힌다.
황병기 선생의 말을 빌리면, 정씨는 세속적으로 아무 욕심도 없고 순하디 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거문고에 대해서 만큼은 누구도 따라가기 어려운 열정을 가진 예술가다.
서울 낙성대역 부근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도 그랬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남이 안 하는걸 해서 그렇지 아직 부족하다”면서도 거문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가야금이 청명하고 튀는 소리라면 거문고는 탁하고 맑고 무거운 소리를 겸비해 ‘울림의 미학’을 갖고 있습니다. 가야금만큼 기교를 부릴 수는 없지만 이 탁한 세상에서 마음을 정화하는 수양(修養)의 악기로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할 수 있죠.”
그가 만든 창작곡은 1971년 국악 관현악곡 ‘연화’ 등 총 40여곡. 한해에 1∼2편을 만든 셈이다. “전 다작을 못해요. 마음에서 우러나는 선율을 완성된 곡으로 만드는 과정은 아기를 낳는 산모의 고통과 같습니다.”
정씨는 한국전쟁 때 아버지를 잃었다. 어머니 혼자 살림을 꾸려가기엔 집안이 너무 어려웠다. 배재중학교에 합격하고도 입학을 포기했다. 1년 뒤 국립 국악양성소(현 국악중학교)에서 장학생 모집 공고를 보고 입학한 것이 ‘국악’을 시작한 계기가 됐다.
막연히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학교에 들어갔지만 단소 대금 무용 등을 배우며 새삼 국악에 매력을 느꼈다. 그는 전공을 정해야하는 중학 3학년 때 거문고를 선택했다.
“남들이 거문고는 어렵다며 피하는 모습을 보고 ‘이걸로 내 인생의 승부를 걸자’고 생각했어요. 거문고를 배우며 울림의 매력을 느끼게 됐지요.”
그는 거문고 연주에 만족하지 않았다. 친구가 빌려준 작곡 책을 노트에 베껴 쓰며 오선지에 악상을 옮기는 법을 홀로 익혔다.
하지만 그가 거문고에 매달릴수록 가정 형편은 기울어 갔다. 중학교 5학년(요즘의 고교 2학년)때 낮에는 수업을 받고 밤에는 물동이를 나르는 일을 하며 학업을 그만둘까 고민한 적도 있다는 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간신히 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는 경주 시립국악원에 국악강사로 취직해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던 중 단국대 측으로부터 장학생으로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1970년 국문과에 입학했다. 국악과가 없는 관계로 국악 동아리에서 작곡과 연주를 계속했다.
정씨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75년 동아 국악 콩쿠르에서 거문고 자작곡 ‘열낙(悅樂)’으로 대상을 받으면서부터. 이듬해 서울시립국악관현악단에 들어가 거문고 주자 겸 국악 작곡가로 그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그의 거문고 독주곡 ‘수리재’ ‘일출’ ‘무령탑’ 등은 우리 고유의 가락에 현대적인 느낌을 가미해 요즘 세대가 들어도 깊고 넓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는 국악이 대중화되기 위해서는 정부 차원에서 국악인을 위한 무대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세계화 시대일수록 ‘우리 것의 소중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
정씨는 85년부터 KBS 국악관현악단 단원으로 일하면서 틈틈이 한국예술종합학교 한양대 등에서 국악 강의를 하고 있다. “창작 연주 활동은 물론 기회가 된다면 청소년을 대상으로 거문고 가야금 등의 무료 강좌 등을 열고 싶다”는 그에게서 국악에 대한 진한 애정이 느껴졌다.
황태훈기자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