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마지막 토요일인 30일 오후 5시반경 서울 중구 장충동 소피텔 앰배서더호텔. 승용차들이 잇따라 들어왔다.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 임재원 임광토건 사장, 구본천 LG창투파트너스 상무, 김 준 경방 전무, 김영재 대덕전자 부사장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오너 경영자’들이 차에서 내렸다. 여기까지는 재계의 여느 친목모임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 면면이다. 하지만 열성회원 중에 한누리법무법인 김주영 변호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면 모임의 성격이 헷갈리기 시작한다. 김 변호사는 참여연대 시절부터 재벌오너 등을 상대로 소액주주운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이들은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만 되면 긴장하는 ‘미래를 경영하는 연구모임(미경연)’의 멤버들이다.
미경연의 주요 멤버들. 왼쪽부터 박희정 미경연회장(굿세이닷컴 사장),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 최정규 맥킨지 한국지사 공동대표, 김주영 한누리법무법인 변호사, 김 준 경방 전무, 서정호 앰배서더호텔 회장
‘미래를 경영하는 연구모임(미경연)’에는 법조계 인사 10여명이 들어 있다. 여기에 재정경제부 금융감독위원회 등에 몸담고 있는 고급 공무원과 북한 김일성대 교수로 있다가 94년 귀순한 조명철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연구위원까지 멤버다. 최정규 맥킨지 한국지사 공동대표, 남종원 메릴린치 한국지사장, 윤종하 칼라일코리아 부사장 등은 ‘해외 선진경영기법의 전파자’로서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언론계와 금융권 인사까지 합해 현재 회원은 약 120명. 단 정치권 인사는 없다.
“각계 전문가들이 갖고 있는 경험과 노하우 및 지식을 함께 나누는 ‘지식 공유모임’이라고 보면 됩니다. 한미통상문제가 현안이었던 89년 ‘미국경제연구회’로 시작했다가 모임 이름을 바꾸었죠. 다들 ‘과외 공부’라고 생각하고 나와요.”
89년 이 모임을 만든 이후 14년 동안 줄곧 ‘사랑받는 독재자’라는 애칭을 갖고 모임을 이끌고 있는 박희정 회장(두레커뮤니케이션 사장·전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의 설명이다.
미경연 멤버들은 모임의 성격을 ‘인맥 만들기용’으로 보는 시각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인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여러가지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우선 이 모임의 명예위원회(Honor Committee)가 독특하다. 법조계 회원 5명으로 구성된 명예위원회는 회원 중 누군가 ‘동료회원에게 부담될 부탁을 한다’거나 ‘누구는 마음이 모임 활동보다 뽕밭에 가있다’는 정보를 접하면 즉시 조사에 착수한다. 사실일 경우 당사자에게 ‘노란 장미’(옐로카드)를 전달하고 이후 시정되지 않으면 ‘재앙의 싹’을 잘라버린다.
명예위원회의 또 다른 직무는 룰을 어기는 회원을 솎아내는 일. 출석률이 50% 미만이거나 사전 통보없이 2회 연속 불참하면 제명된다. 이렇게 한 해에 잘려나가는 회원들이 10명 중 1, 2명꼴이며 엄격한 룰을 견디지 못하고 제발로 걸어나가는 회원들 또한 적지 않다.
미경연 회원이 되려면 기존 회원의 추천이 있어야 한다. 6개월 동안 동종업계 인사를 대상으로 피 추천자의 됨됨이를 탐문한 뒤 회장단의 최종 면접을 거쳐 신입회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정식회원 자격은 1년간 임시회원으로 활동한 뒤에야 주어진다.
월례 모임에서 회원들이 가장 긴장하는 코너는 ‘1분 스피치’. 각자 한달 동안 겪었던 일이나 들려주고 싶은 정보를 1분 안에 정리해 발표하는 시간이다. 1분이 되는 순간 어김없이 회장은 ‘시간종료’를 알리는 종을 흔든다.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사람은 말도 끝맺지 못한 채 얼굴이 벌개져서 자리에 앉아야 한다. 1분 스피치를 듣다보면 한달 동안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고 어떤 변화의 징조가 있는 지 가늠할 수 있다.
김주영 변호사는 “기업 공직사회 언론계 등의 가감없는 얘기를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소액주주 운동을 하면서 균형감각을 찾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또 회원들을 괴롭히는 것은 매달 홈페이지에 올려야 하는 ‘사이버 스피치’. 각자 자기 전문분야에 관해 새로운 글을 하나씩 올리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글을 올리지 않으면 5만원의 벌금이 부과된다. 모인 벌금은 소년소녀가장돕기에 쓰인다.
“여러 모임이 있지만 이 곳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긴장감’입니다. 거저 먹겠다는 ‘프리 라이딩’은 절대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죠. 뭔가를 얻어가려면 뭔가를 내놓아야하는 ‘기브 앤드 테이크’의 원칙이 철저히 지켜지는 곳입니다.”(칼라일 코리아 윤종하 부사장)
이 모임의 전문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때는 지난 97년. 남종원 메릴린치 한국지사장과 양호철 모건스탠리 한국지사장 등은 외환위기 발생 6개월 전부터 외환위기의 가능성을 재경부 등에 강하게 전달했다. 청와대 경제수석실 등을 거쳤던 재경부 조원동 심의관(해외파견)이 모임의 멤버였기 때문에 미경연의 조언이 대책 마련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14년간 월례모임에서 이 곳을 거쳐간 70여명의 초청연사는 한결같이 ‘파워 엘리트’들. 지난달 30일에는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이 초청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지금까지 제일 초청하기 어려웠던 인물은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 91년 그를 연사로 초청했는데 수락까지 꼬박 6개월이 걸렸다. 일단 연사로 단상에 올라서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초청연사들은 난감해지기 일쑤다. 지난해 5월 초청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는 회원들의 질문공세에 “얼마나 붙잡고 있을 생각이냐”는 말로 겨우 끝을 볼 수 있었다.
회원들은 요즘 미경연에 ‘부드러움’을 불어넣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40세 이하 주니어멤버의 수장격인 최재원 SK텔레콤 부사장은 최근 농구모임을 만들었다. 매주 월요일 새벽 남산체육관에 가면 10∼15명의 미경연 회원이 몸을 부딪치며 땀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6개월에 한번씩 가는 멤버십 트레이닝에서 40세 이상 시니어멤버의 리더인 홍석준 삼성SDI 부사장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밥을 짓고 설거지도 거든다.
기자는 미경연 멤버들이 ‘정말 공부만 할 것인지’에 의문이 들었다. 이에 대한 박 회장의 대답은 솔직했다.
“그동안은 공부모임이었지만 앞으로는 각계에 제대로 된 ‘지도층’을 배출할 수 있는 장(場)으로 만들어갈 생각입니다. 함께 나눈 지식과 그동안 지켜온 ‘규율’로 말입니다. 물론 곱지 않은 시선도 있겠지만 제대로 된 사회 지도층만 있었다면 한국이 IMF관리체제를 겪지 않았을 거란 지적을 생각하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요.”
박현진 기자 witnes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