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1995년 작)가 뒤늦게 국내에서 개봉됐다. 이 자리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담은 이 애니메이션에 쏟아진 평론가들의 찬사를 되풀이할 필요는 없다. 영화 ‘매트릭스’ ‘다크 시티’ ‘제5원소‘ 등이 기꺼이 모방한 ‘공각기동대’의 미래 세계는 이미 우리에게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공각기동대’와 니체, 알튀세, 베버, 스피노자를 한자리에 놓고 언급하는 일은 낯설다. 알튀세는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에서 사회는 무의식에 작동하는 ‘호명’을 통해 그 사회에 필요한 인간을 재생산한다고 했다. 알튀세의 ‘호명’ 수준을 넘어 곧바로 ‘조작’에 들어가는 것이 바로 ‘공각기동대’의 미래 세계다. 어쨌든 애니메이션과 철학이라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만남이 ‘이것은 애니메이션이 아니다’(문학과경계사 펴냄)에서 실현되었다. 이진경 고병권 고미숙 손기태 이종영 이성근 정여울(이상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 연구원) 등 7명의 재야 학자들은 12편의 애니메이션을 기호로 삼는다. 이진경은 ‘은하철도 999’에서 ‘기계화 모성 메텔’로 집약되는 근대문명의 종착점에 다다를수록 생명사상, 인간 중심주의로 돌아갈 수밖에 없음을 역설했고, 고병권은 ‘평성 너구리 전쟁 폼포코’를 보며 한나 아렌트가 말한 ‘노동을 많이 하면 동물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분석한다. 들뢰즈가 “철학은 숲 속이나 오솔길에서가 아니라, 도시와 거리에서 그리고 이들이 만들어낸 좀더 인위적인 것들 안에서 만들어진다”고 한 말을 곱씹어보면 이번 철학자들의 ‘외도’를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최석진은 일본 아니메에 투영된 일본의 현대사를 꿰뚫어보고 ‘여기에선 저 일본이 신기루처럼 보인다’(써드아이 펴냄)고 썼다. 여기서 ‘신기루’란 일본 사회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단편적으로 한 작품의 내용과 기법만 분석해 온 그간의 무지와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정확히 말하면 유령)의 독백 “1945년 9월21일 밤 나는 죽었다”로 시작하는 ‘반딧불의 묘’(원작 노사카 아키유키)는 흔히 반전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저자는 오히려 자신들이 희생자임을 앞세워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얼버무린 일본인들의 역사의식을 문제 삼는다. 패전 후 일본의 모습은 또 다른 애니메이션 ‘인랑’(원작 오시이 마모루)으로 이어지며, 일본의 미래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예견돼 있다. 저자가 ‘여기에선 저 일본이 신기루처럼 보인다’를 통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애니메이션이라는 가상현실에서 일본의 실체가 더 분명히 보인다는 역설일 것이다.
주간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