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적 연구 프로그램의 방법론/임레 라카토슈 지음 신중섭 옮김/454쪽 2만2000원 아카넷
임레 라카토슈(1922∼1974)의 이 저서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헝가리 태생인 그는 어머니와 할머니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는 가족 수난을 겪었고, 그 자신도 반나치 저항운동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2차 대전 후 헝가리 정부의 고위 관리직을 맡기도 했으나, 권위에 맹종하기를 거부하는 태도 때문에 수정주의자로 몰려 3년간 감옥 생활을 했다. 1956년의 헝가리 혁명에 적극 참여했으나, 혁명이 실패하자 빈으로 도피했다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합리성에 대한 라카토슈의 학문적 관심은 비합리적 사회에서 그가 겪은 극한적인 체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가 비판적 합리성을 개방적 사회와 과학적 진보의 원동력으로 본 칼 포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자연스럽다. 라카토슈가 과학철학 분야의 연구를 시작한 1960년대 중반, 포퍼의 과학철학은 과학 활동의 실상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토머스 쿤 등의 역사적 비판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을 라카토슈는 과학의 합리적 지위가 위협받는 것으로 보았고, 이를 방어하는 것을 자신의 철학적 과제로 삼았다. 라카토슈는 과학방법론이 과학 활동의 역사적 현실과 괴리돼서는 안 된다는 쿤의 주장을 수용하는 한편, 포퍼의 ‘소박한 반증주의’를 ‘세련된 반증주의’로 발전시켜 과학사의 합리적 재구성에 적용하고자 했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에서 바로 그런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세련된 반증주의’가 ‘소박한 반증주의’와 다른 점은, 개별 이론이 아니라 일련의 개별 이론들로 구성되는 과학 연구 프로그램을 방법론적 논의의 단위로 삼은 것이다. 이 점에서 패러다임을 과학 활동의 주된 단위로 보았던 쿤의 접근 방식과 유사하나, 연구 프로그램과 개별 이론들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하려 한 점에서 진일보한 면을 보여준다. 즉, 라카토슈는 연구 프로그램이 그것을 특징짓는 기본 원리들의 집합체인 견고한 핵, 보조 가설들의 집합체인 보호대, 그리고 방법론적 지침들인 발견법들로 구성되며, 보호대에서의 변화가 이론의 경험적 내용을 증가시키는 추세를 보일 때 진보적이고, 그렇지 못할 경우 퇴행적이라 여겼다. 이로써 그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은, 쿤의 패러다임 이론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이 변칙 사례에 직면해서도 왜 쉽게 자신의 이론을 포기하지 않는지, 그러한 태도가 왜 반드시 비합리적이지 않는지 등의 문제들을 다룰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다.
라카토슈는 쿤의 이론이 지닌 장점들을 공유하면서, 과학의 합리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옹호할 수 있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연구 프로그램에 대한 그의 평가 기준들은 과학자들의 판단을 위한 사전 지침이 되지 못하고 사후 평가 지침에 그치는 한계를 안고 있다. 파이어아벤트는 이런 이유에서 라카토슈의 이론을 “위장된 아나키즘”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연구 프로그램 이론과 적용이 과학적 합리성의 이해를 위해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 것은 틀림없다.
조인래 서울대 교수·과학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