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타임’이 됐네.”
검토실의 한 기사가 중얼거렸다. 오후 정각 7시. 기사들은 오후 7시 이후를 ‘이창호 타임’이라 부른다.
제한시간 4시간 바둑이라면 막 초읽기에 들어갈 무렵이다. 8시간 동안 전력을 다해 바둑을 둬온 기사들의 머리가 혼미해지는 시간. 대부분의 기사가 이 시간 무렵에는 대국 초반과 같은 맑은 정신과 집중력을 갖기 힘들다. 하지만 이 때부터 이창호 9단의 바둑이 진가를 발휘한다. 그의 집중력은 여전하고 수읽기에는 흔들림이 없다. 유리한 바둑을 쉽게 마무리하는 것은 물론이고 불리한 바둑도 상대방의 바늘구멍만한 빈틈을 찌르고 들어가 역전을 일궈내는 이 9단의 독무대가 시작된 것이다.
18일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에서 열린 제45기 국수전 도전 5번기 3국. 미세하지만 백을 든 이 9단에게 조금 더 점수를 주고 싶은 형세. 중앙에 흑이 얼마나 집을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인터넷 해설을 하던 장수영 9단도 “참 어려운 대목”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일까. 슥슥 두어나가던 조 9단이 손길이 멈췄다. 오후 7시 20분. 8시간 동안 팽팽하던 형세가 갑자기 20분 사이에 백 절대 우세로 바뀌고 있었다. 그다지 어려운 수도 없었고 평범한 흐름이었던 것 같은데 흑은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중앙 흑세가 전부 지워지고 백이 알토란같은 우하귀 흑 3점을 잡으며 승부는 끝났다. 백이 덤 6집반을 받지 않아도 되는 반면 승부가 돼버렸다.
조 9단은 귀신에 홀린 듯 바둑을 망쳐버린 아쉬움에 몇 수를 더 두다가 돌을 내려놓는다.
지난해말 삼성화재배 우승 이후 하늘을 찌를 듯 하던 조 9단의 기세도 LG배 세계기왕전에서 유창혁 9단에게 2대3으로 역전패 당한 뒤 하향곡선을 긋고 있다. 조 9단은 LG배 이후 1승 6패를 기록하고 있다.
‘이창호 타임’을 얘기하던 기사가 한마디 더 던졌다.
“이창호 타임이 될 때 창호가 반집이라도 유리하다면 승패를 더이상 물어볼 필요가 없어요.”
서정보기자 suhchoi@donga.com
▼유리하던 흑 선수뺏겨 미세한 국면▼
백이 중앙 백대마를 방치하고 △로 철저하게 실리를 취한 장면. 조 9단은 흑 1 한점을 미끼로 세를 쌓은 뒤 중앙 백대마를 공격할 참이다. 성동격서의 표본같은 수. 하지만 이 수에 앞서 흑 ‘가’와 백 ‘나’의 교환을 해야 했다. 그 다음 상변을 정리하고 선수를 잡아 흑 ‘다’로 공격하는 것이 이 장면의 정답. 하지만 ‘가’와 ‘나’를 해두지 않는 흑은 ‘라’로 연결해야 했고 백이 선수를 잡아 중앙 대마를 보강하자 국면은 흑 유리에서 미세한 형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