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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방형남/장마리 르펜

입력 | 2002-04-22 18:24:00


‘악명 높은(notorious)’이라는 부정적 형용사를 달고 있는 국제적 인물이 더러 있다. 미국의 시각에서 보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등이 그런 사람이다. 인류의 평등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프랑스의 극우정치인 장마리 르펜(73)을 서슴없이 악명 높은 인물로 꼽는다. 극우정당 국민전선(FN)을 이끌고 있는 르펜 당수는 불법체류 외국인을 추방해야 한다면서 걸핏하면 인종차별 발언을 쏟아내 물의를 일으키는 유명한 ‘트러블 메이커’다. 그런 그가 21일 실시된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당당히 2위를 차지해 ‘악명’을 전 세계에 떨쳤다.

▷프랑스 대통령 선거는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1, 2위 득표자가 결선에서 대결하는 방식으로 치러진다. 르펜 후보가 결선에 진출하기는 했으나 현직 대통령인 공화국연합(RPR)의 자크 시라크 후보를 누르고 역전승을 일궈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만년 3위 후보’로 취급됐던 르펜 후보가 현직 총리인 사회당의 리오넬 조스팽 후보를 밀어낸 선거결과는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다. 좌우로 팽팽히 갈라져 있는 프랑스에서 사회당 후보가 대선 결선에 진출하지 못한 것은 33년 만에 처음이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특히 2년 전 오스트리아에서 불었던 ‘극우파 열풍’을 떠올리며 긴장하고 있다. 르펜 후보가 현직 총리를 물리친 차점자로서 프랑스 정계는 물론 유럽 정치판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기 때문. 르펜 후보처럼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을 공공연히 내비치는 극우정치인 외르크 하이더가 이끄는 자유당이 오스트리아 총선에서 27%의 표를 얻어 연정에 참여하자 유럽연합(EU)이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잠시 단절하는 등 유럽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졌었다. 르펜 후보는 한때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르펜 후보의 결선 진출에 대한 프랑스인의 반응은 경악과 반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미 여러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르펜 후보 반대시위를 벌였으며 결선투표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도 압도적인 시라크 후보 우세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르펜 후보를 지지한 17.02%의 프랑스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지울 수는 없을 것이다. 국민전선은 잔다르크를 당의 심벌로 추앙하고 있다. 기고만장한 르펜 후보가 잔다르크 기념일인 5월12일 파리 시내 잔다르크 동상 앞에서 무슨 돌출발언을 쏟아낼지 궁금하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