糟 糠 之 妻(조강지처)
糟-술찌게미 조 糠-겨 강妻-아내 처 宴-잔치 연 貧-가난할 빈賤-천할 천
糟糠은 술찌게미와 겨다. 술찌게미란 술을 거르고 난 다음 남는 찌꺼기로서 밀기울이 주성분이다. 지금은 가축의 사료로나 쓰일까 사람은 먹지 않지만 옛날 보릿고개가 있을 때만 해도 먹을 것이 없어 술찌게미를 먹고 대낮에도 술 취한 사람처럼 아녀자들이 붉은 얼굴을 하고 다녔던 적이 있었다.
한편 糠은 겨다. 벼를 찧고 나면 남는 벼 껍질의 잔해가 되겠는데 잘게 부서진 거친 가루라고 생각하면 된다. 역시 먹을 것이 없었던 옛날에는 이것도 버리지 않고 떡을 해 먹었는데 생긴 모습부터 정나미가 떨어졌다. 꼭 쇠똥 마냥 시커먼데다 맛도 없어 ‘개떡’이라고 했다. 먼 옛날 얘기 같지만 불과 3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때는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다.
糟糠을 먹었던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孔子(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 중에 顔回(안회)가 있었는데 어찌나 가난했던지 糟糠조차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나이 스물 아홉에 夭折(요절)했다. 그래서 糟糠이라면 본디 ‘변변치 못한 음식’을 말했는데 후에는 糟糠을 먹으면서 고통과 가난을 함께 했던 夫婦(부부)를 뜻하기도 한다.
後漢(후한)을 세웠던 光武帝(광무제)에게는 누님인 湖陽公主(호양공주)가 있었다. 일찍 과부가 되어 守節(수절)하던 중 大臣 宋弘(송홍)을 보고는 그만 마음이 기울고 말았다. 물론 그는 有婦男(유부남)이었다. 고민 끝에 동생 光武帝에게 중매를 요청했다.
光武帝는 성대한 酒宴(주연)을 차리고 그를 초청했다. 누님도 불러 병풍 뒤에서 엿듣게 했다. 光武帝가 宋弘의 意中을 떠보았다. “사람이 한 平生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 地位와 돈은 매우 중요하지. 그것만 있다면 친구나 아내도 쉽게 구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宋弘의 대답은 의외로 단호했다. 오히려 天子를 꾸짖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옛말에 貧賤之交不可忘(빈천지교불가망·가난하고 비천했을 때에 사귀었던 친구일수록 잊어서는 안 됨)이요 糟糠之妻不下堂(조강지처불하당·糟糠을 먹고 어려움을 함께 헤쳐왔던 아내는 마루에서 내려오게 해서는 안됨)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말에 光武帝는 물론 병풍 뒤의 누님도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糟糠之妻(조강지처)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지금도 人口에 膾炙(회자)되고 있는 名句로서 시사하는 바가 많다. 出世하고 나서 함께 고생했던 아내를 헌신짝 차버리듯이 하는 사람이 있다. 바람직한 현상은 아닐 것이다.
鄭 錫 元 한양대 안산캠퍼스 교수·중국문화 sw478@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