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정치사회 일각에서 이념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아주 바람직한 일이다. 왜 그러한가. 이념논쟁을 하는 것이 어느 정파에 유리하고 어느 정파에 불리해서가 아니다.
이념이란 본래 ‘가치의 세계’인데 이 가치의 세계에 대한 논쟁을 하다 보면 우리의 삶이 우리가 주장하는 가치나 이념과 얼마나 괴리되어 있는가가 저절로 명백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격렬한 이념논쟁을 통해 정치권의 허구와 부실이 보다 극명하게 나타날 수 있고, 이를 우리 모두가 자기반성과 성찰의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전 대안없는 이념논쟁▼
우리가 이념논쟁을 하다보면 다음의 사실에 주목하게 될 것이다. 첫째, 가치나 이념을 논하기 이전에 모두가 먼저 정직해야 하고 언행이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정치인은 자신의 말에 정치적 생명을 걸어야 하고, 학자는 자신의 주장에 일생의 명예를 걸어야 한다. 선거전의 말과 당선된 후의 행동이 다르고, 노동자들 앞에서의 말과 기업인들 앞에서의 말이 다르며, 야당 때의 주장과 여당 때의 행동이 다르다면 이것은 이념과 가치 논쟁 이전의 문제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념논쟁이 무슨 의미가 있고 보수와 진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둘째, 이념논쟁을 하다보면 우리 사회에는 이미 모든 국민이 합의하는 이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다. 우선 이것부터 제대로 실천해야 한다. 그런데 오랜 민주화 투쟁을 한 세력이 정권을 잡고 나서도 도청과 감청, 세무사찰과 표적사정, 언론분열과 의원 빼가기가 있다면 이것은 무슨 역사의 아이러니인가. 국정운영 경험 부족으로 인한 국정혼란은 이해하고 용서할 수도 있으나, 민주화 투쟁세력의 반민주적 작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가장 강하게 부정부패를 공격하던 정치세력이 앞장서서 ‘게이트’를 양산하고 있고 이를 최고 권력이 은폐하려 한다면, 이 무슨 역사의 배리(背理)인가. 한 마디로 자유민주주의도 못하고 법치주의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진보고 무슨 보수인가. 우리는 이 근본적인 문제에 답해야 한다.
셋째, 우선 정치이념으로서 자유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실천하고 나면 그때부터 우리는 사회경제 분야의 이념으로서 보수와 진보를 논할 수 있다. 본래 역사적으로 보면 보수에는 수구적 보수와 개혁적 보수가 있고, 진보에는 개혁적 진보와 혁명적 진보가 있다. 그런데 수구적 보수와 혁명적 진보는 모두 자유민주주의의 원리에 반할 뿐만 아니라 이미 역사적 실험과 평가가 끝난 실패한 이념이다. 이제 의미있는 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전제로 한 ‘개혁적 보수’와 ‘개혁적 진보’ 간의 경쟁뿐이다. 그리고 이 경쟁은 국가정책에서 자유와 평등, 성장과 복지, 물질과 정신, 그리고 시장과 국가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로 나타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정과제에는 진보적 해결이 필요한 부분도 있고 보수적 해결이 필요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이 두 이념간의 생산적 경쟁은 국가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나라 보수세력은 외국과 달리 너무 과거 회귀적이고 현상유지적이다. 정치 경제 시스템을 고쳐서 모두가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 보겠다는 비전이나 열정도 지도력도 안 보인다. 기득권이나 현실안주의 경향이 강하고 공동선을 위한 자기희생이 너무 없다. 그러니 새로운 역사를 여는 개혁적 비전과 진취적 행동이 나오질 않는다. 기껏해야 원조보수나 보수연대논쟁 등을 하지 미래를 여는 담론이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합리적인 개혁세력 돼야▼
국민을 답답하게 하는 것은 진보세력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진보 속에는 아직도 20세기 혁명주의에 대한 환상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 과거청산이 불충분하니 미래의 안목이 열리지 않는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국가비전과 합리적 정책대안을 만들 준비나 능력도 의사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합리적 대안제시 없이 구호만 과격하다.
현재 나타나 있는 우리나라의 보수와 진보는 둘 다 미래세력이 아니다. 국민에게 미래의 꿈과 희망을 주는 안민(安民)세력이 되려면 보수 진보 모두가 크게 환골탈태해야 한다. 세계관을 바꾸고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개혁세력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개혁적 보수와 개혁적 진보간의 경쟁을 만들어 내야하고, 이를 국가비전과 국가정책 경쟁으로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여기에 나라의 미래를 여는 참된 이념논쟁의 의의가 있다.
박세일 서울대 교수·법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