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위를 질주하는 돌고래.’
한국 기술자들이 만든 고속철도 열차 ‘KTX 13’에 붙은 별명이다. 철도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위용(偉容)’을 보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4월 12일 오후 3시 경남 창원시 대동동의 ‘로템(옛 한국철도차량)’ 공장에서는 한국 철도역사의 새 장이 열리고 있었다. KTX 13의 시험 운행식이 열린 것.
왕영용 건설교통부 고속철도기획단 운영기획과장은 “이 차량이 ‘제2의 포니 승용차’가 돼 지구촌 곳곳을 누비고 다니면 좋겠다”면서 감격해했다.
▽취중(醉中)에도 메모하며 기술 배워〓현대자동차 기술진이 포니를 개발하기 위해 이탈리아와 일본의 기술자들로부터 갖은 고초를 겪으며 기술을 전수받았던 것처럼 로템의 고속철도 열차 제작진도 비슷한 역경을 거쳐야 했다.
95년 8월 프랑스 알사스지방 벨포르시에 있는 알스톰사 동력차 공장에서 있었던 일.
한국에서 파견된 기술자 10여명이 프랑스 기술자들과 고속열차(TGV)의 설계 도면을 앞에 놓고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한국 기술진은 “차체가 돌고래 곡선을 하고 있는 것은 공기 저항을 줄이려는 의도냐”라고 물었고 프랑스 기술진은 “원천 설계기법은 기술이전 계약 조건에 없는 내용이므로 공개할 수 없다”는 냉랭한 답변만 되풀이했다.
그날 저녁 한국 기술자들은 퇴근하는 프랑스 기술자들을 공장 인근 술집으로 잡아끌었다. ‘이국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달래고 기술자로서 연대감을 다지자’는 명분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생전 처음 보는 폭탄주가 수십 잔 오고갔다. 덕분인지 ‘마음의 장벽’이 무너졌다. 한국 기술자들은 몇 마디 들은 것을 취중에서도 메모했다. 이튿날부터 프랑스 기술자들은 한결 친절하게 기술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정용완 고속철도공단 차량본부장은 “94년 말부터 최근까지 약 8년 동안 1000명이 넘는 한국 기술진이 짧게는 1주일, 길게는 6개월 정도 프랑스에서 기술 연수를 받았다”며 “이들은 프랑스 기술진을 상대로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가며 기술을 익혀나갔다”고 회고했다.
▽프랑스 기술자들도 놀랄 정도〓국내 기술진이 이렇게 술자리와 개인적 친분을 이용해 귀동냥으로 익혀나간 기술력은 이제 원산지인 프랑스 기술자들이 놀랄 정도로 높아졌다.
99년 7월 현대정공 대우중공업 한진중공업 등 3사가 합병해 설립한 회사 로템과 고속철도공단이 지난달 독자 모델로 선보인 ‘한국형 고속전철 1호 차량’이 단적인 예.
이 차량은 최고 운행속도가 시속 350㎞로 프랑스 알스톰사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경부고속철 전동차(KTX)보다 50km 빠르다. 이는 차체를 연강으로 만든 경부고속철도 차량과 달리 알루미늄을 압축한 압출재로 제작해 무게를 줄여서 얻어낸 소득이었다.
차체를 끌고 가는 주행장치는 중국의 시난(西南)교통대학에서 시속 407㎞의 성능시험을 거쳐 안정성을 인정받았을 정도.
▽수출은 가능할까〓현재 고속철도 건설을 추진하고 있는 국가는 중국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브라질 미국 등 6개국 정도.
이 가운데 대만은 이미 일본 신칸센(新幹線)으로 차량을 선정했기 때문에 로템이 진출할 여지가 없다. 고속철도공단이 알스톰사와 계약할 때 유럽과 북미로는 수출하지 못한다는 단서 조항을 달았기 때문에 미국으로는 수출이 불가능하다.
나머지 아시아 오세아니아 남미 지역 등에는 수출할 수 있다. 단, 알스톰사와 협의를 거쳐야만 한다. 따라서 독자 수출은 어렵고 알스톰사와 로템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수출하는 길은 열려 있다.
▽남은 과제는〓로템의 가장 큰 고민은 내년 10월말까지 경부고속철도에서 운행할 차량을 납품하고 나면 내수용으로는 일감이 없다는 점. 후속 사업인 호남고속철도사업은 착공 시기조차 잡히지 않았고 당장 수출도 여의치 않기 때문에 막대한 돈을 투자해 만든 생산시설이 무용지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에 따라 로템은 고속철도 구간 외에 현재 전철화가 진행되고 있는 기존 철도 노선에 KTX13을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이용규 로템 생산기술팀장은 “프랑스에서도 고속화 전철 설비를 갖추지 않은 기존 철도노선에 고속철도차량인 TGV가 달리고 있다”며 “이왕 들여온 기술을 사장시키지 않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KTX13의 후속 수요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현대자동차가 포드나 미쓰비시의 단순 조립공장 제안을 거부하고 독자 모델 개발에 나서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한 사례를 로템이 새겨봐야 한다”면서 “성능을 더 개선해 세계 시장을 뚫어야 할 것”이라고 조언하고 있다.
송진흡기자 jinh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