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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속의 에로티시즘]독일 과일유통업체 광고

입력 | 2002-04-25 15:27:00

과일이 주는 다산성의 이미지가 유머러스하게 담겨있다


플라톤은 절대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을 가진 자에게만 그의 공화국에 발을 들여 놓을 자격을 주었다. 근대 서구 철학사에서는 이 맥을 이어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인간의 이성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면서 이 세상은 인간의 정신에만 고결함을 부여했다. 인간의 육체는 그 고결한 정신을 담는 그릇에 불과했다. 그러나 거대 이성이 가져다 줄 것으로 믿었던 유토피아는 그 안에 내재된 숙명적 야만성을 드러내며 원자폭탄과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배태한 도구적 이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세상은 오랫동안 방치돼 온 몸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몸에 대한 철학적 담론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정신병리학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권력의 담론으로 이용돼 왔는가를 밝힌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같은 코드로 임상의학의 탄생이 어떻게 인간의 몸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 왔는가를 밝혔다. 이제 인간의 몸은 오장육부와 뼈와 살을 담고 있는 일정한 질량을 가진 형체라는 사전적 정의로만 이해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다.

여기 두 편의 광고를 보자. 남자의 커다란 생식기가 돌출돼 보이는 부분에 ‘바나나 ㎏ 당 1.89마르크’라는 가격이 적혀 있다. 여자의 풍만한 가슴엔 ‘멜론 개당 2.99마르크’라고 적혀 있다. 독일의 숄츠앤드프렌즈라는 광고사에서 제작한 과일·채소 유통업체의 광고다. 형태의 유사성을 빗대어 인간의 신체 일부를 과일에 비유했다. 상당히 선정적인 광고다. 먹는 음식을 인간의 가장 민감한 성감대에 결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얼굴 절반 이상이 잘려 있는 레이아웃은 보는 이의 시선을 생식기와 가슴으로 집중시키는 효과를 발휘한다. 다산성을 곧바로 느끼게 하는 두 사람의 풍만한 육체는 과일과 야채가 주는 건강미의 이미지를 잘 대변한다.

혹자는 인간의 육체를 상품화했다고 비난을 보낼 법하다. 그러나 이처럼 인간의 신체를 곧이 곧대로 사물에 대한 메타포로 쓸 수 있는 지금은 그래도 행복한 경우다. 트랜스젠더가 화면에 얼굴을 내밀고, 인간복제의 기술적 가능성이 점쳐지고, 인간의 몸이 사이보그처럼 부분의 교환과 재조합으로 변형 가능한 시스템에 불과할 수도 있는 시대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남성의 생식기를 바나나로 여성의 가슴을 멜론으로 비유할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을까?

선정적인 아이디어로 눈길을 끌면서도 과일과 육체의 공통분모를 떠올리게 해 웃음짓게 한다.

나는 내가 누구인가를 말할 수 있는가? 이제는 몸을 통해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원자폭탄이 그랬듯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인간 복제의 연구가 어떤 용도로 악용될는지는 알 수 없다. 신체의 부분을 떼어 내고 붙이는 사이보그 시스템이 정착되어 마치 돈육의 부위에 이름을 붙여 팔듯 인간의 신체 부위를 진열대에 내놓고 팔게 된다면 도구적 이성에 의해 몸마저 침탈당하는 광기의 역사가 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리수의 등장은 여러 점에서 의미 심장하다. 그는 성형된 여자다. 그녀의 만들어진 가슴은 자연산의 싱싱한 멜론이 아니라 성형된 멜론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광고는 이천 몇십 년 쯤의 어느 성형회사의 광고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자 생식기 이식에 얼마, 여자 가슴 심는데 한쪽 에 얼마…. ‘나는 성형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21세기의 존재 이유가 될 것인가?김홍탁

광고평론가·제일기획 크리에이티브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