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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루마·레이 정, 뉴에이지 음악도 이젠 토종시대

입력 | 2002-04-25 16:30:00


삶이 결국 외롭고도 긴 기다림이라면, 그 기다림의 과정에 동반자는 반드시 필요하다. 향기로운 술이나 그윽한 커피도 좋고, 아껴가면서 읽고 싶은 책도 빠질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음악이 없다면, 그렇지 않아도 쓸쓸한 삶이 얼마나 더 삭막해질까.

뉴에이지 음악은 기계 문명, 도시 문화를 배격하고 인간 본래의 치유 능력에 주목하는 뉴에이지 운동에서 비롯된 음악 장르다. 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편안한 멜로디로 표현해 듣는 이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이다. 재즈와도 비슷하지만, 재즈보다 리듬이나 비트가 적고 동양적 정감이 강해 듣기에 부담이 없다.

이 같은 뉴에이지 음악의 요소를 고루 갖춘 조지 윈스턴의 ‘디셈버’(December)는 1980년대 중반 국내에 소개되어 ‘클래식은 어렵고 대중음악은 시끄러워서 싫은’ 사람들을 삽시간에 매혹시켰다. 이후 뉴에이지 음악 열풍은 앙드레 가뇽, 유키 구라모토, 야니, 엔야, 시크릿 가든 등 세계 각국의 뮤지션들로 쉴새없이 이어졌다.

# 발라드에 익숙한 성인세대 ‘느낌 팍’

그러나 뉴에이지 음악의 국내 인기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국내 출신의 뉴에이지 뮤지션은 드물다. 김광민의 1집 ‘지구에서 온 편지’, 노영심의 ‘피아노 걸’ 정도가 그나마 뉴에이지 음악으로 손꼽을 만한 음반들이다. 일본이 유키 구라모토를 비롯해 류이치 사카모토, 이사오 사사키 등 탁월한 뉴에이지 뮤지션을 여럿 배출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뉴에이지 음악은 클래식 음악과 상당히 가깝습니다. 하지만 국내의 클래식 전공자들은 뉴에이지 음악을 ‘가벼운 음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요. 반면 10대부터 발라드 음악을 들으며 성장해 온 성인 세대는 요즘의 가요 시장에서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음악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틈새시장에 일본의 뉴에이지 뮤지션들이 자리잡은 것이죠. 일본 뉴에이지 음악은 멜로디 진행이 가요와 비슷하지만 가요보다 더 서정적이고 깊이도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 칼럼니스트 황덕호씨는 “클래식에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 팝이나 가요, 재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한국 출신 뉴에이지 뮤지션이 탄생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최근 음반 시장에 등장한 두 명의 한국 뉴에이지 뮤지션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희소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루마(24)와 레이 정(32), 이 두 사람은 각기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식으로 클래식 음악을 배웠다. 탄탄한 연주와 작곡 실력은 물론, 편곡과 프로듀싱까지 해내는 점은 흡사하지만 각자의 음악 경향은 완전히 다르다. 이루마의 음악이 세련되고 단아한 서정의 세계라면, 레이 정의 음악은 먼 곳에서 불어와 귓가를 스치는 한줄기 바람처럼 역동적이다.

# 이루마 "사람의 일생에 가장 큰 주제는 사랑"

“음악에서 장르란 무의미한 것이죠. 바흐의 음악은 아주 간단한 코드와 변주로 이루어져 있지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누구에게나 사랑받고 있어요. 장르를 따지기 전에 바흐의 음악처럼 단순하면서도 깊이 있는 음악이 가장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루마의 경력은 여러모로 특이하다. ‘뜻을 이룬다’는 의미의 순 한글 이름부터가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다. 그는 11세 때부터 영국에 유학해 퍼셀스쿨과 런던대학의 킹스칼리지에서 작곡과 피아노를 공부한 음악 엘리트.

그러나 이루마가 뜻을 둔 것은 처음부터 클래식보다 뉴에이지 음악 쪽이었다. 그는 지난해 5월과 12월 1집 ‘Love Scene’과 2집 ‘First Love’를 연이어 내놓았다. 이중 2집에 들어 있는 ‘When the love falls’는 드라마 ‘겨울연가’에서 최지우의 테마 음악으로 사용되며 이루마의 성가를 한껏 높였다.

“어떤 의도나 계산 없이 자연스럽게 음악을 썼어요. 제가 편안하게 썼으니까 아마 듣는 입장에서도 부담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만 1집이 좀 어두운 느낌이 든다고 해서 2집은 좀더 밝은 기분이 들도록 신경 쓴 정도죠.”

이루마의 음악은 주로 사랑의 느낌을 담은 것이 많다. 음악과 연주가 모두 잔잔하고 담백하지만, 20대 초반 젊은이가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깊이가 느껴진다. 그 자신의 말처럼 약간의 우수가 묻어나는 1집이 오히려 2집보다 더 성숙한 인상을 준다. 역시 음악성과 나이는 별 상관이 없는 것일까.

“뉴에이지 음악을 하려면 삶에 대한 경험이 좀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기는 해요. 솔직히 사랑을 주제로 한 곡을 쓰기가 쑥스러울 때도 있어요. 하지만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는 역시 사랑이 아닐까요?”

4월27일 이루마는 영산아트홀에서 콘서트를 연다. 쇼케이스 형태의 작은 무대를 제외하면 첫번째 한국 연주회다. 세 번째 음반 녹음도 벌써 진행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오아시스’의 이미지 음반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이루마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오아시스’의 몇몇 장면을 보고 영화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음반을 작곡했다. 그의 음악적 상상력을 실감할 수 있는 이 이미지 음반은 영화 개봉에 앞서 5월중 뮤직비디오와 함께 공개될 예정이다.

# 레이 정 "우리 정서를 담은 뉴에이지 뮤지션이 목표"

레이 정의 첫 음반 ‘메모리 오브 더 데이’를 들으면 긴 여행의 장면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황량한 바람소리와 함께 고비 사막을 지나 서역으로 향하는 실크로드, 또는 구약성서 사본이 발견되었다는 사해 부근의 동굴을 찾아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여정에는 항상 동양의 정서가 흐르고 있다. 연주에 피리, 대금 등의 국악기를 사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작곡가 자신의 뿌리칠 수 없는 정체성이 음악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감각을 음반 속에 담아내려고 애썼습니다. 뉴에이지 음악이라고 해서 가벼운 음악 취급은 받고 싶지 않았어요. 우리 정서를 제대로 담은 뉴에이지 뮤지션이 목표입니다.”

레이 정은 이 음반을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도 많이 소개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정구영이라는 본명을 사용하지 않고 ‘빛’이라는 뜻의 ‘레이’ 라는 예명을 지었다. 그는 광고음악계에서는 제법 알려진 인물. 1993년 파리 국립음악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이후 LG화학, 걸리버, 017 등 200여편의 광고음악을 제작했다.

레이 정의 음악은 기존 뉴에이지 음반들과 여러모로 다르다. 피아노는 물론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 세션 악기를 많이 사용해 곡에 따라서는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들린다. 특히 대금 소금 해금 피리 등 국악 관악기를 전면에 배치해 파격적인 느낌을 준다. “국악기는 서양악기와 음높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세션으로 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꼭 국악기, 그중에서도 관악기를 사용하고 싶었어요. 대나무의 울림이 주는 긴 여운 때문이죠.”

‘진홍빛 땅으로의 긴 여정’ ‘대나무 숲 아래 산책’ ‘정읍사’ ‘쿤람의 동굴’ 등 독특한 제목의 곡들이 수록된 음반 ‘메모리 오브 더 데이’는 한국 발매와 동시에 홍콩 싱가포르 대만에서도 라이선스로 발매될 예정이다.

전원경 주간동아 기자 winni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