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해외화제도서]조스팽의 대선출사표 '대답의 시간'

입력 | 2002-04-26 18:16:00


대답의 시간/스톨 출판사 2002년

16명의 대선 후보 명단이 공식 발표된 지난 4월 5일 이후, 본격적인 프랑스 대통령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미디어의 열기가 달아오르는 것과는 반대로, 별다른 쟁점 없이 진행된 이번 선거에 프랑스 국민들은 처음부터 냉담했다. 그러나 지난 일요일 1차 선거에서 발생한 예상치 못했던 이변으로, 프랑스 대선은 프랑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전세계인의 주목을 끄는 일대사건이 되었다. 현재 프랑스는 정치권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깊은 충격과 우려에 휩싸여있다. 유력한 사회당 후보였던 현 총리 조스팽 후보를 밀어내고 극우파 후보인 르펜이 결선에 오르는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기존 좌우파 정치인들에 식상한 유권자들의 ‘정치적 무관심’과 치안 불안에 시달린 일반 프랑스 국민들의 ‘안전 강박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선거 결과로 인해, 필자는 세인들의 관심에서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책을 ‘화제의 책’으로 소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대답의 시간(Le temps de r´epondre)’은 리오넬 조스팽과 언론인 알랭 뒤아멜의 대담을 엮어 만든 책이다. 조스팽은 이 책에서 기자와의 대담 형식을 빌어 자신의 삶과 정치 사상을 소상히 밝히고, ‘좌우동거정부’ 5년을 돌아보며 좌파 정권이 이룬 업적과 대통령 후보로서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조스팽이 출마를 공식 선언할 무렵에 맞춰 출간된 이 책이 대선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강변할 수는 없지만, 독자들 앞에 솔직하게 자신의 정치철학을 선보인 책임에 틀림없다. 적어도 대통령 후보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극적인 구호나, 모호한 이미지로만 유권자에게 다가가지 말고, ‘한 권의 책’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조목조목 밝힐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조스팽은 분명 ‘준비된 대통령 후보’였다.

각종 미디어가 총동원되는 현대 선거전에 ‘책 출판’이 가세하게 된 것은 ‘독서 문화’가 대중화되어 있는 프랑스에서도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프랑스 선거법에 따르면, 책 출판은 공식 선거 비용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하니, 책이 잘 팔릴 경우, 돈도 벌고 선거 운동 비용도 절약되고, 말 그대로 일석이조가 아닌가.

지난해 출간된 시락 대통령의 부인 베르나데트 시락 여사의 수필집 ‘대화’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책은 2001년도 수필부분 베스트셀러 1위의 영예를 안았다. 그 덕분에 시락 여사는 다른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함께 전통의 문학 카페 ‘프로코프’에 초대되었다. 당당히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시락 여사가 남편의 선거운동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경제학 교수 출신으로 미테랑 대통령 시절 교육부 장관을 역임했던 조스팽은 대선에 운이 없는 인물이다. 95년 첫 출마했던 대선에서는 1차 선거에서 시락 후보를 앞섰으나, 결선투표에서 역전패했고, 이번에는 ‘좌파의 분열’과 ‘극우파의 선동 정치’로 인해 고배를 마시게 되었다.

조스팽은 1차 선거 결과가 발표된 당일, 이번 대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화려한 몸짓이나 웅변술도 없고, 군중을 자극하는 선동술에도 익숙하지 않은 그였지만, 분명 자신의 정치철학을 갖고 있던 솔직한 정치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조스팽과 시락 후보의 불꽃튀는 결선투표를 못 보게 돼서일까, 왠지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임준서 프랑스 LADL 자연어처리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