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조건/만프레드 프랑크 지음 최신한 옮김/320쪽 1만3000원 책세상
신인상파 화가였던 죠르쥬 쇠라는 ‘그랑자트라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에서 푸른 잔디를 나타내기 위해 독특한 방법을 사용한다. 그는 초록색으로 잔디를 표현하는 대신에 노란 색점과 파란 색점을 캔버스에 마구 찍어놓았다. 하지만 보는 사람의 눈에는 분명 캔버스 위에 푸른 색 잔디가 그려져 있을 뿐이다. 쉐브렐의 ‘색의 동시대비성의 원리’를 증명하고 있는 이 그림의 메시지는 결국 색이란 사물 고유의 색이 아닌 빛과 인간의 착시적 효과가 만들어낸 결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라캉, 푸코, 데리다, 들뢰즈와 같은 탈구조주의 철학자들이 보기에 근대 철학이 인간의 실체로 보았던 ‘주체’ 역시 색과 마찬가지로 근대인의 착시 효과로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합리적 판단에 의해서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주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한다. 라캉은 주체란 타자라고 못을 박고 있으며, 이를 뒤이어 알튀세는 주체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이 자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는 언어나 행동도 알고 보면 이미 사회적으로 정해진 언어나 행동을 답습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상황을 일컬어서 ‘인간의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표현도 마다하지 않는다.
독일 튀빙엔대 교수(철학)인 저자의 이 책은 탈구조주의자들의 이런 상황분석을 일단 논의의 전제로 받아들인다. 대신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죽음’이라는 현대의 상황을 다소 고전적 개념인 니체의 ‘신의 죽음’으로 표현한다. 니체의 경우 신의 죽음은 형이상학적 의미의 상실을 뜻하는데, 저자가 이런 개념을 차용한 이유는 아마도 ‘인간’ 혹은 ‘주체’라는 형이상학적 의미의 상실이 곧 인류 자체의 위기와 동일하다는 인식 때문인 듯하다. 물론 저자는 이들 탈구조주의자들의-이 책의 저자는 이들을 신구조주의라고 부른다- 주장이 무의미한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아니다.
어찌 보면 신구조주의자들의 합리성 비판은 그 자체가 현대의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합리성 비판이 무조건 타당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보기에 합리성이 왜곡된 양상을 띨 경우에는 비판받아 마땅할지라도 합리성 자체가 완전히 부정될 수는 없다. 저자가 이성을 굳이 분석적 이성과 종합적 이성으로 나누어 칸트 식의 종합적 이성을 새롭게 회복해야 할 필요성을 주장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독자들이 이 대목만 이해할 수 있다면 자기의식과 상호주관성의 대립, 혹은 독일의 철학자 헨리히와 하버마스의 논쟁에 대한 저자의 입장 등 이 책의 가장 어려운 철학적 부분들까지도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현대 프랑스 철학을 독일관념론과 해석학적 관점과 비교한 탁월한 저서 ‘신구조주의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일부 지식인들에게 이미 알려진 독일의 신진 철학자다.
이번에 번역 발간된 ‘현대의 조건’은 독일 철학 특유의 신중하고 정리된 언어를 통해서 프랑스 철학을 되씹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쉽게 접할 수 없었던 책이다. 독일 철학 전공자나 프랑스 철학 전공자 혹은 현재 철학적 담론에 깊이 있는 접근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권할 만하다.
박영욱 고려대 강사·서양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