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이후 금융당국은 ‘시장에 맡긴다’는 원칙을 자주 거론했다.
산업 한빛 조흥 외환 등 ‘정부계 은행’들이 지난해 10월 하이닉스반도체에 돈을 쏟아 부을 때도 이근영(李瑾榮) 금융감독위원장은 “정부 의지와는 무관하며 채권단이 자율적으로 결정했을 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었다.
하지만 이 위원장은 26일 하이닉스 해외매각안에 불만을 표시해온 투신 증권 리스 보험 등 제2금융권 사장들을 소집함으로써 ‘시장자율에 맡긴다는 원칙을 스스로 뒤집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다. 이 위원장은 이 자리에 모인 사장들에게 “하이닉스는 매각 이외에 대안이 없다”고 못박는 ‘대담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투신권 사장들의 관점에서 이 문제를 보자. 이들은 고객이 맡긴 돈 등 1조2500억원을 하이닉스에 지원했다가 ‘절반을 포기하라. 나머지 절반도 하이닉스 잔존법인이 회생한 뒤에 찾아가라’고 강요받고 있다.
시장 원칙이란 간단하다. 투신사 사장들이 △채권회수 가능성 △투신사 고객보호 △반도체 시장전망 등을 냉정하게 살핀 뒤 내린 판단대로 29일 최종회의에서 찬반 의견을 내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정부는 주요 은행의 대주주로 은행의 핵심적인 경영판단에 대해서는 주주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기 견해를 밝힐 수도 있다. 또 투신 증권 등 제2금융권이 부실해질 경우 추가적인 공적자금을 투입해야 할 위험을 사전차단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다. 나아가 ‘하이닉스 처리가 국가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할 때 정부가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그러나 겉으로는 ‘시장원리 존중’을 외치면서 뒤로는 온갖 간섭을 일삼는다면 이는 시장원리만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시장의 투명성에까지 먹칠을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더욱이 간섭하는 이유가 ‘주주 이익’이나 ‘국가경제 고려’ 보다는 ‘양대 선거를 앞둔 정지(整地)작업’에 무게가 더 실려있다는 의심을 받게 되면 폐해는 훨씬 커진다.
김승련기자 경제부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