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되풀이하면서도 진전한다고 했던가. 정국이 대선자금과 한보비리문제로 벌집 쑤신 듯했던 5년 전의 봄과 똑같이 돌아가고 있다. 소재와 배역만 바뀌었을 뿐이다.
현재 한나라당 대통령후보로 유력시되는 이회창(李會昌)씨가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에 의해 신한국당 대표로 발탁된 것이 1997년 3월이다. 그때도 김 대통령의 ‘김심(金心)’에 대해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나돌기는 했지만 이 대표는 사실상 여당의 대권주자로 부상했다.
국회는 한보청문회를 열어 김 대통령의 아들 현철(賢哲)씨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 갔다. 정권에 대한 강공 드라이브의 주역은 국민회의 총재였던 김대중(金大中) 현 대통령이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김 대통령도 아들문제에 대해서는 초연한 입장이라며 나머지 10개월 잔여임기를 국정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버티던 현철씨는 이회창씨가 신한국당 대표로 발탁된 지 약 2개월 후인 5월 17일 ‘나는 아무 죄가 없다’는 말을 남기고 구속됐다.
▼온정주의는 안된다▼
당내 경선을 통해 27일 민주당 대통령후보가 된 노무현(盧武鉉)씨도 5년 전 이 대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직면해 있다. 김 대통령의 세 아들에 대한 비리 의혹은 캐면 캘수록 줄줄이 엮어져 나와 끝이 보이지 않는다. 5년 전에는 비리의혹에 관련된 대통령 아들이 한 명이었지만 지금은 세 명이다. 그 중 누가 현철씨처럼 사법처리의 대상이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러나 추세는 한 명이든 두 명이든 그 쪽으로 가고 있다.
대권을 꿈꾸던 5년 전의 신한국당 이 대표는 대표 취임 직후 현철씨 문제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생각해 봐야 한다”며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은근히 강조했다. 그러다 상황이 악화되자 냉정한 법 논리의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한다. 이 대표는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의혹이 해소되어야 한다” “법과 논리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 “아들의 구속과 대통령의 국정수행은 별개다”라며 거리를 둔다.
노 후보는 지금 김 대통령의 아들들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나가고’ 있는가. 대선 후보가 확실시된 이달 중순부터 한 말을 나열해 보자. “나의 선거에 불리할지 모른다는 잠재적 가능성 때문에 누구를 잡아넣으라는 식의 야박한 소리를 하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이 적절하게 처리할 것이다.” “대통령의 자제문제가 나와 민주당에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아주 조금씩 내용을 ‘진전’시키고 있다. 자신이 공개적으로 약속한 탓인지 ‘야박한’ 소리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상당히 온정적인 말투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누가 보아도 청와대의 눈치를 살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노 후보는 27일 후보수락 연설을 통해 정치개혁, 원칙과 신뢰, 국민통합이라는 3대 과제를 제시했지만 당장 궁금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국민의 관심은 여당의 대권 후보로서 현 정권의 비리와 대통령 아들들의 문제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으며 어떤 해결책을 갖고 있는가에 쏠려 있다. 노 후보가 앞으로 어떻게 말을 바꾸어 나갈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러나 노 후보는 5년 전 이회창씨처럼 당의 대표가 아닌 대권주자다. 이 대표보다 더 소신 있게 흑백을 가리자고 얘기를 할 수 있는 처지다.
김 대통령이 노 후보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 아들문제에 대해 직접 나서 명쾌하게 해결할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李順子)씨가 96년 12월 동아일보에 게재한 회고록에 따르면 6·29선언 당시 전 대통령은 그 선언의 모든 ‘영광’을 40년 친구인 노태우(盧泰愚) 후보에게 돌리기 위해 혼자 각본을 짜고 연출을 맡았다. 6·29선언의 배경에 대해서는 주장이 엇갈리지만 당시 두 사람 사이에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밟고 넘어가도 괜찮다”는 식의 ‘의리’가 통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지금 김 대통령이 노 후보를 은밀히 불러 “내 아들 문제를 치고 나와도 괜찮다”며 노 후보의 당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겠다고 하겠는가.
▼´의혹´정면 거론해야▼
어차피 김 대통령의 아들들 문제는 노 후보가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산이다. 어떤 정치적 은혜를 입었다면 그것은 두 사람간의 사적인 관계에 불과하다.
노 후보는 당장 김 대통령 아들문제를 정면 거론하고 나서야 한다. ‘부산 사나이’ ‘의리’ 운운하며 ‘야박한’ 소리는 않겠다고 할 시기는 이미 지났다. 김 대통령은 아들들의 잘못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지만 노 후보는 ‘아버지의 잘못’도 단죄하겠다는 용기를 보여야 한다. 그게 민심이다. 민심의 방향을 모른다면 대권주자의 자격이 없다.
남찬순 논설위원 chans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