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길로 접어든 탄광촌 고한 끄트머리에 단아하게 서 있는 정암사 적멸궁.
서울 청량리를 출발한 강릉행 무궁화호 열차가 터널을 자주 통과하는가 싶더니 태백산맥 가운데 자리잡은 강원 정선에 다다랐다.
산이 높은 만큼 깊은 골짜기 사이로 예미-증산-사북-고한역이 굽이굽이 자리잡고 있다. 역시 골짜기 사이로 집이니 가게니 아슬아슬하게 땅바닥에 붙어 있는 탄광촌 고한역에 내리자 길가에 즐비한 전당포의 새 간판들이 눈에 띈다.
‘이곳에 강원랜드가 있었지’ 하는 생각도 잠깐. 고한의 가느다란 외길 끄트머리에 무심히 절 하나가 서 있다. 탄광촌 바로 넘어 이토록 정갈하고 고요한 산사가 있음에 놀란다.
신라의 큰스님이었던 자장율사가 태백산 서쪽 기슭에 창건한 정암사(淨岩寺). ‘숲과 골짜기는 해를 가리고 멀리 세속의 띠끌이 끊어져 정결하기 짝이 없다’ 해서 이름지었단다.
함백산(1573m)은 태백산의 일부로 이 절을 둘러싸고 있다.
절마당에 들어서면 왼쪽에 요사채가 있고 오른쪽엔 산위에서 경내로 흐르는 계곡이 있다. 물이 맑고 찬 곳에서만 자라는 열목어들이 한가로이 헤엄친다.
석가모니 사리를 봉안한 수마노탑
적멸궁은 돌다리 넘어 입구를 등지고 앉아 있다. 적멸궁은 창건 당시 자장율사가 석가모니의 사리를 수마노탑에 봉안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건립한 것으로 수마노탑에 불사리가 봉안돼 있기 때문에 적멸궁엔 불상이 없고 꽃병만이 눈에 들어왔다. 적멸궁 앞뜰을 감싸고 있는 나지막한 돌담이 정겹다.
돌담 너머로는 온통 크고 작은 산봉우리 뿐. ‘주장자’란 고목은 자장율사가 신표로 평소 사용하던 주장자를 꽂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가지 일부가 회생하여 성장한 것이라고.
다시 돌다리를 건너 수마노탑이 있는 뒷산에 오른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돌계단이 가파르지만 숨이 찰 무렵이면 방향을 틀어 이 때 한숨 돌릴 수 있다. 15분 정도 오르니 수마노탑이 서 있다. 코 앞에 있을 산사는 나뭇잎에 가려 보이지 않고 적멸궁의 까만 기와만이 한낮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인근 산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오지만 그 너머 역시 산봉우리뿐이다.
북쪽으로는 금대봉이 있고 남쪽으로 은대봉이 있으니 그 간 어디에 자장율사가 중생의 눈을 피해 세웠다는 금탑과 은탑이 있을 텐데….
서둘러 증산역으로 되돌아가 겨우 정선선 ‘꼬마열차’(기관차와 객차 두 칸)에 올랐다.
증산역을 출발해 종착역인 구절리역까지 45.9㎞. 그 사이에 역은 모두 다섯 개(별어곡 선평 정선 나전 아우라지).
한적하던 객실이 정선에서 올라탄 한무리의 관광객들로 소란스럽다.
지난달 22일은 마침 정선장날이어서 새벽 청량리에서 출발한 ‘정선장 관광열차’를 타고 온 50∼60대가 짬을 내 꼬마열차에 오른 것. 대학생 막내딸과 함께 온 아주머니는 “시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햇도라지를 1만원어치 샀다”고 자랑한다.
철로변 단풍구경이나 설경 감상은 할 수 없지만 파릇파릇 푸릇푸릇한 산골 풍경도 황송한 듯 모두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가는 길〓태백선 청량리∼고한역, 정선선 꼬마열차(증산↔구절리·문의 033-591-1069)〓태백선 청량리∼증산역 또는 태백선 청량리∼정선역 △영동고속도로/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제천IC∼38번 국도∼영월∼신동∼별어곡역∼증산역∼사북역∼고한역∼414번 지방도로∼정암사
정선〓김진경기자 kjk9@donga.com
경주박물관장 시절의 필자(왼쪽). 오른쪽은 최순우 당시 중앙박물관장.
◇ 그곳에 가면
1959년인가 그 이듬해인가 태백산 정암사에 간 일이 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 국사교관으로 있었는데, 정암사는 청정한 도량이고 그곳에 있는 신라의 탑이 훌륭하다고 들었다.
지도 한 장 없이 카메라를 메고 선배 한분과 길을 나섰다. 청량리에서 시꺼먼 연기를 뿜어대는 기차를 타고 밤새 달려 정선에 내린 것은 이른 아침. 거기서 물어물어 버스를 타고 태백산 밑까지 가니 벌써 낮 12시. 거기서도 길도 차도 없는 곳을 오십리는 가야한단다.
한참 탄길을 따라 오르는데 석탄트럭이 올라오고 있었다. 차를 세워 사연을 말하니 운전기사가 이 차는 정암사 근처까지는 아니 가도 탄광본부에 가면 또다른 탄차가 정암사 근처를 지나니 타라고 했다. 한시간쯤 덜컹거리며 오르막 내리막 수백번에 그 탄광본부에 다달았다.
그곳에서 다시 탄차의 운전석 옆에 떡하니 타고 또 한시간쯤 가서 정암사 아래서 내렸다. 기사분이 친절하게 산사에 이르는 길을 일러준다.
정암사에 도착한 것은 저녁해가 뉘엿뉘엿 지려는 시각이었다. 심산유곡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저희가 절도 보고 탑도 보러 왔습니다’고 했다.
그 때 정암사는 강원(講院)이 있는 그야말로 청정 비구만 수도하는 곳이라 일절 바깥사람을 재우지 않는다고 했지만 해는 이미 서산을 넘고 말았다. 스님네가 도리없이 정갈한 절방 하나를 내어준다. 스님네는 어린아이같이 맑고 깨끗해 신선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밥 한 그릇 된장 조금, 시래기 짜게 절인 것이 전부였지만 바람만 마셔도 배가 불렀다. 원장스님은 그 때 법명이 석호스님이었는데 깡마르고 깐깐해 보였지만 우리를 대하는 모습은 인자했다.
탑은 적멸보궁 뒤편의 가파른 언덕에 축대를 쌓고 그 위에 모셨다. 높이가 9m 되는 수마노석으로 된 모전석탑으로 여러 가지 발색도 신비롭지만 그 산중에 어떻게 저렇게 거룩한 탑을 조성해 모셨는가 하고 자못 흥분됐다.
탑머리에 청동상륜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탑의 각층 추녀에는 풍탁이 달려있어 그 장엄하고 수려함이 다른 곳 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아침 공양 일찍하고 떠나려 하니 스님네가 내려가는 길은 수월하니 점심공양 들고 가라고 간곡하게 말한다. 점심공양은 과연 탁탁한 진미였다. 몇가지 잡곡이 섞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찰밥에 들깨를 갈아 볶은 나물이 찬이었다.
석호스님은 나중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법호 서옹이시고 지금은 백양사 방장으로 계신다고 들었다. 서옹스님과 그때 청정무구한 스님네의 성불하심을 빈다.
정양모 경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