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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사외이사 ‘열린기업’엔 보약

입력 | 2002-04-30 18:06:00


매월 넷째 주 금요일. SK 서울 종로사옥 17층 임원 회의실에서는 SK텔레콤 이사회가 열린다.

손길승 회장, 최태원 회장, 조정남 부회장, 표문수 사장과 사외이사 6명 등 이사진 12명이 거의 빠짐없이 참석한다. 사외이사들은 상정된 안건에 대해 질문을 하고 격의 없는 토론도 벌인다.

손 회장이 지난해 초 “바쁜 분들이니 아예 날짜를 정해 이사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해 매달 넷째 주 금요일로 이사회 날짜를 정했다. 회사측은 안건이 있는 날은 미리 내용을 사외이사들에게 알려주고 실무자가 별도의 설명도 한다. 평소 ‘학구파’로 알려진 최 회장은 사회의 흐름과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꼬박꼬박 이사회에 참석한다.

한국에 본격 도입된 지 5년째를 맞는 사외이사 제도. 논란이 적잖고 일부 물의를 빚기도 했지만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기업에 ‘보약’이 될 수도 있다. SK텔레콤 경영기획실 관계자는 “사외이사를 회사의 ‘반대자’가 아니라 회사 경영에 책임이 있는 임원으로 생각하면 얻을 것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경영의 안전판〓투자자들에게 주요 기업의 지배구조 정보를 제공하는 ‘좋은 기업지배구조 연구소’(대표 김주영 변호사)는 최근 경영자의 잘못된 판단을 견제함으로써 훌륭한 사외이사 활동을 한 실례로 현대중공업과 삼성전기의 사례를 꼽는다.

현대중공업 사외이사들은 2000년 현대중공업으로 하여금 현대증권과 하이닉스반도체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게 했다. 현대중공업은 옛 현대전자의 자금 대출에 지급보증을 섰는데 이것이 이사회의 결의를 거치지 않아 무효라는 것. 현대중공업은 1월말 1심에서 승소해 1718억원을 돌려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삼성전기 사외이사인 한양대 손정식 교수(경제학)는 지난해 이 회사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보의 e삼성인터내셔널 주식 90만주를 36억원에 매입하는 결의를 하는 과정에서 유일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해 표결까지 가도록 했다.

손 교수는 “그 문제는 내가 옳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고 흑백논리로 판단할 사안은 아니다”면서 “오히려 삼성전기 이사회가 잘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외이사는 회사가 정상적인 의사결정을 하는데 안전판 역할을 한다”면서 “열린 마음으로 외부에 자문하려는 경영자의 의지가 사외이사제 정착에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사외이사제를 잘 운영한다는 평을 듣는 SK텔레콤은 경영상의 중요한 결정에 대해서는 이사회 전에 사외이사들의 사전승인을 받는 규정도 만들었다. 계열사간 100억원 이상의 거래나 해외투자 등은 사외이사의 사전승인이 필수다. 사외이사 6명 중 2명은 소액주주들의 몫으로 선임됐다.

▽벤처기업엔 단비〓대기업과 달리 벤처기업들은 부족한 자원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사외이사를 활용한다. 얼마나 능력있는 사외이사를 모시느냐에 따라 회사의 미래가 좌우되기도 한다.

벤처경영을 전공한 이장우 경북대 교수는 “벤처기업은 부족한 경영능력과 마케팅, 펀딩에 도움을 받고, 연구방법을 개발하는 데 훌륭한 사외이사가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벤처기업이 성장할수록 경영상의 결정에서 사외이사의 역할도 중요해진다”면서 “최근 잇따른 ‘게이트’도 사외이사 제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투자자인 벤처캐피털에서 파견된 사외이사는 막강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인터넷기업 야후의 최고경영자 팀 쿠글을 벤처캐피털 사외이사가 데려온 것처럼 투자기관 출신 사외이사는 경영진과 이사회 구성에 직접 관여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일부 벤처캐피털이 기업의 사외이사로 들어가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변대규 휴맥스 사장은 “1년 이상 SK텔레콤 사외이사를 하는 동안 많이 배웠다”면서 “휴맥스도 올해부터 사외이사제를 도입하는데, 의무라서가 아니라 제대로 해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남아 있는 논란들〓현행 사외이사제 운용에 대해서는 정반대 측면에서의 비판적 시각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각에서는 1998년 기업의 투명성을 높인다는 취지로 이 제도가 의무화됐지만 대주주나 경영자를 감독 견제하기엔 역부족이라며 평가절하한다. 1년 동안 한번도 이사회를 열지 않거나 경영자와 가까운 사람들을 선임해 ‘거수기’ 또는 ‘들러리’로 이용한다는 지적도 있다.

반면 재계에서도 불만이 나온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사외이사제도는 기업 경영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기업의 투명성 제고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서 의무조항 폐지를 건의하기도 했다.

또 일부 명문대학 총장이나 시민단체 지도급 인사들이 대기업의 사외이사를 맡으면서 거액의 스톡옵션이나 ‘거마비’를 받아쓴 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논란과 현실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외이사제도를 적절히 운영하기만 한다면 한국기업의 경영투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 견해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상장회사 사외이사의 직업 분포 (2001년 6월말 기준)구분경영인교수변호사회계/세무사고문/자문연구원사회단체무직기타합계인원(명)3632671271037038313291121440구성비(%)25.218.58.87.24.92.62.222.87.8100자료:한국상장회사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