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후보에게 지난번 대선 때 경선 불복에 대한 사과를 요구했던 칼럼 ‘이인제의 빚’이 동아일보(2002년 1월30일자)에 나간 후 격려의 편지와 전화가 쏟아졌다. 항의전화는 딱 한 통뿐이었다. 이인제 후보 측으로부터 항의를 받고 이러한 사실을 가감 없이 전했다.
이 후보를 위한 충고이니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 쪽에서는 “특정지역 사람들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응답했다. 이렇게 민심을 모르니 이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하기는 어렵겠다고 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그는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음모론, 색깔론으로 노풍을 예상 밖으로 키워준 장본인이 되었다.
정치인들이 번번이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은 정치인 자신의 책임도 크지만 언론의 책임이 더 크다. 언론은 공론의 장이기 때문이다.
▼눈앞 표 좇다 큰 것 잃을 수도▼
노무현 후보는 여론이 파도와 같은 것이라면 공론은 조류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조류에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며 그 방향도 예측할 수 있으니 공론은 믿을 만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리고는 DJ와 YS의 화해를 추진하는 ‘신민주연합론’을 공론에 부치겠다고 천명했다.
노 후보가 민주당의 대통령후보로 당선된 직후 언론은 노 후보의 ‘민주세력 재결집’의 부당함을 알리는 사설과 칼럼을 쏟아냈다. 이는 열 번 맞는 말이다. 문제는 언론에서 이뤄진 공론을 노 후보가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것이다. 노풍을 예상하지도 못했고, 그 원인 분석도 제대로 해내지 못한 언론의 충고가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지 걱정스럽다.
노 후보가 ‘신민주연합론’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노 후보 스스로도 노풍의 원인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존경받는 기업인 안철수 대표의 최근 저서 ‘영혼이 있는 승부’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노 후보와 안 대표의 성공 뒤에는 벤처정신이 있다는 점에서 세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이들은 남에게는 보이지 않는 미래를 보는 혜안이 있었기에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한창 잘 나갈 때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해 미래를 준비했다.
둘째, 자존심이 강해 원칙에 어긋나는 타협을 하지 않았다.
셋째, 어떤 성과에 연연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과 가치를 추구하다보니 대박을 터뜨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민주연합론’은 이러한 과거 행적과는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인다. 원래 지방선거는 총선과 달리 지역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따라서 YS와의 연대가 노 후보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시적인 성공은 늘 치명적인 실패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안 대표의 깨달음이다.
지방선거에서 이겼다고 대선에 이기는 것도 아니고, 의원을 몇 명 끌어들이는 것이 대선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도 아니다.
3당 합당 뒤에 치러진 1992년 총선에서 합당의 주역인 민정당은 참패를 했고, 신생정당인 국민당은 약진을 했다. 의원을 움직인다고 해서 국민이 그 앞에 줄을 서지는 않기 때문이다.
안 대표는 기업이 발전했다고 느낄 때가 바로 변화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그리고 변화할 때는 핵심역량에 집중해야 한다고 한다. 노 후보가 진정으로 정계 개편을 원한다면 노 후보의 핵심역량을 발굴해야 할 것이다.
노 후보의 핵심역량은 두 가지다. 하나는 신념을 지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 후보가 다른 후보에 비해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것이다.
▼쟁점정책 입장 분명히 밝히길▼
국민은 복지, 재벌 규제, 대미 관계의 쟁점에서 민주당 의원들의 정책 선호보다 훨씬 더 진보적인 정책을 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 후보는 자신의 입장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한다. 색깔론이 두려워 자신의 정책적 입장을 계속 숨겨서는 국민의 지지를 유지할 수 없다.
현재 노 후보의 지지기반은 중산층이다. 막상 노 후보의 정책으로 혜택을 받을 만한 서민층을 지지세력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이런 계층을 설득해서 중산층과 서민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것이 노 후보가 하려는 정계 개편의 핵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언론의 비판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비판을 받아들여 어떻게 발전시키느냐 하는 것은 순전히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다.
조기숙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