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정계개편론을 공론화, ‘새판짜기’의 시동을 걸고 나서면서 정치권이 두개의 축을 중심으로 개편의 급류를 탈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나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주창해온 ‘민주대연합론’이고, 다른 하나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을 중심으로 고개를 들기 시작한 ‘보수대연합론’이다.
두 논의의 공통점은 외형상 이념을 중심으로 ‘헤쳐 모이자’는 것이어서 언뜻 보면 보-혁 대결 구도를 향한 흐름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 꺼풀을 벗겨내고 보면 그 실체는 영남지역의 패권을 둘러싼 지역쟁탈전인 셈이어서 ‘신(新) 지역연합론’의 성격이 짙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재 정계개편 논의의 동인(動因)은 노 후보의 민주대연합론이다. 과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던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분열됐던 민주세력을 일거에 복원해내자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명분이다.
그러나 노 후보 주장의 이면에는 양김(兩金)의 결합을 통해 영남, 그 중에서도 부산-경남(PK)과 호남을 지역적으로 결합시킨다는 전략적 목표가 내포돼 있다. 노 후보는 오래 전부터 “이념은 가르고 지역은 묶자”는 지론을 펴왔고, 대선승리의 필수조건으로 ‘PK 지역 800만표의 위력’을 누누이 강조해왔다.
노 후보측은 민주대연합론이 과거 DJP 연대가 낳았던 ‘지역주의 심화와 이념의 혼선’이라는 퇴행적 부작용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은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영남을 겨냥한 노 후보의 민주세력 결집론은 이념과 지역에 기반한 ‘보수연대론’의 반작용에 직면할 것이 뻔하다.
호남과 PK를 진원지로 ‘노풍(盧風·노무현 바람)’이 맹위를 떨치자 이미 보수진영이 세결집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고 있는 데다 지역적으로는 충청권과 대구-경북(TK)지역 일각에서 소외감 때문에 반발기류가 나타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현재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는 ‘국민대통합론’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나 내용상 최병렬(崔秉烈) 후보나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재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한 ‘보수연합론’과 차별성은 거의 없다.
다만 노 후보에게 영남 일각이라도 내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이회창 후보로서는 영남의 보수뿐만 아니라 개혁세력까지 끌어안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어 ‘국민대통합’이란 좀 더 포괄적인 용어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게 정치권 안팎의 분석이다.
한나라당이나 자민련 관계자들 중에는 ‘노무현 발 정계개편’이 시작되면 이탈할 가능성이 적지 않은 민주당의 이인제(李仁濟) 의원 진영과 무소속 박근혜(朴槿惠) 의원 세력까지 통합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JP가 30일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의원을 ‘연대 대상’으로 꼽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윤영찬기자 yyc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