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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화제도서]'안주하지 않는 우리들의 문화-동아시아 유랑'

입력 | 2002-05-03 17:35:00


도쿄에서

◇ 안주하지 않는 우리들의 문화-동아시아 유랑

강신자는 재일동포 3세 수필가다. 그의 데뷔작인 ‘극히 보통의 재일 한국인’(1986)은, 당시까지 주로 정치적 문맥에서만 언급되던 ‘재일(在日)’ 문제를, 젊은 세대의 눈으로, 일상 생활의 차원에서 그려 내 큰 화제가 됐었다. 그 후 강신자는 한국과 일본의 대중문화에 대한, 재기 넘치는 에세이를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데, 이 책은 그가 일본의 한 대학에서 했던 강의 ‘동아시아 문화론’을 정리한 강의록이다.

이 책을 관통하고 있는 테마는, 역사의 폭력에 짓눌러 ‘월경(越境)’과 ‘유랑’의 회오리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작은 목소리가, 역사의 중심 무대에 선 위인과 영웅들의 큰 목소리에 묻혀 지워지고 만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저자에 따르면, 사실은 이들이 만든 ‘순결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는 문화’야말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키워드이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유랑하는 민중에게만 주목하고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국가’, ‘민족’이 지상 명제가 된 근대 동아시아의 대중문화를, 때로는 잡초처럼, 때로는 비애에 빠진 모습으로,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이동’하고 ‘경계를 넘는(越境)’ 저자의 시점은, 그가 ‘재일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국가, 민족, 국민이라는 틀이 잘라 내던져 버렸던 사람들의 존재에 눈길을 향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들으며, 그들의 기억을 되살림’과 동시에, ‘이동과 유랑이 낳았던 문화의 혼혈과 풍부함’을 다시 한 번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미래로 들어가는 입구가 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러나, 강신자의 필치는 한없이 부드럽고 포근한 울림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드러운 목소리의 깊은 곳에는 순수함과 안주를 거부하는 단단한 결의가 숨어 있다. 강신자가 “일본 사람인가, 한국 사람인가 하는 양자택일의 발상에는 강한 위화감을 느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나는 일본 사람도 아니며 한국 사람도 아니다. 이 같은 경계선상의 존재는 왜 일본이라는 국가 측에서도 한국 민족 측에서도 거부당해야만 되는가?”라는 그의 물음은 의미심장하다. 그가, 1990년에 갑작스런 사고로 세상을 떠난 러시아의 록 그룹 ‘키노’의 리더였던 빅토르 초이와, 중국의 반체제 록 가수 츠이젠(崔建), 두 사람의 최(崔)를 떠올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는 끊임없이 ‘이의 제기’를 해 온 그들의 목소리에 강신자 자신의 목소리를 겹쳐 보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이연숙 히토쓰바시대교수·언어학ys.lee@srv.cc.hit-u.ac.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