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구와 기계의 원리/데이비드 맥컬레이 글 그림 박영재 박영숙 옮김/400쪽 2만9800원 서울문화사
초등학생 때 온갖 종류의 자석을 가지고 있는 친구가 있었다. 이 자석은 자전거 전등용 발전기에서 나온 것이고 이건 라디오 스피커 뒤에 달린 것이라고 자신의 보물을 하나씩 소개하던 그 친구의 얼굴은 로봇 태권V를 만든 과학자처럼 멋져 보였다. 내가 모르는 어떤 신비에 다가선 선구자라고나 할까, 어린 시절 기계나 전기제품의 내부를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대단한 자랑거리였다.
데이비드 맥컬레이가 쓴 ‘도구와 기계의 원리’는 어린 시절 느꼈던 그런 신기함을 떠올리게 해준다. 이 책은 1988년 처음 출간된 이래 20개국에서 300만 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미 보스턴 글로브-훅 북 논픽션 분야 최우수 도서상, 영국 더 타임스 선정 교육 분야 최우수 도서상, 영국 COPUS(과학대중화위원회) 과학도서상 등 수많은 상을 받은 책이다. 이번에 국내에서 번역, 출간된 것은 21세기 과학 발전을 반영해 IT 분야를 새로 추가한 1998년 개정판이다.
도구나 기계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특정한 과학적 원리를 따르고 있다. 기계가 움직이는 모습이야 분해를 해보면 알 수 있지만 왜 그런 움직임이 나오는지를 이해하려면 원리를 알아야 한다. 이 책에 나오는 도구와 기계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 쓰임새보다는 원리에 따라 분류된 점이 독특하다.
이 책에서 제일 먼저 소개한 원리는 빗면에 의한 힘의 절약이다. 가파른 길을 걸어가면 힘은 들지만 걷는 거리는 단축된다. 그러나 약간 비탈진 길을 올라가면 힘이 덜 들고 대신 걷는 거리는 늘어난다. 일의 크기는 힘에 거리를 곱한 값이기 때문에 두 경우 모두 일의 양이 같게 된다. 그래서 도구나 기계를 작은 힘으로 움직이려면 비탈길을 이용하면 된다. 바로 쐐기가 그것이다. 이 책에는 쐐기 모양의 날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쟁기나 지퍼가 함께 설명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수력 발전소와 치과용 드릴은 모두 축바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펜과 자동차 연료 주입기가 모두 압력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같이 등장한다. 이처럼 겉으로 보면 크기도 차이 나고 하는 일도 다른 사물들이 사실 같은 원리로 작동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단편적인 지식이 아닌 종합적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
이와 함께 이 책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맥컬레이의 독특한 일러스트다.
맥컬레이가 처음 쓴 책들은 주로 건축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 가운데 ‘대성당’은 중세 건축물을 일러스트와 함께 설명한 책으로 출간하자마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바 있다. 그 후로도 맥컬레이는 ‘도시’ ‘피라미드’ ‘성’ ‘공장’과 같은 건축에 관한 책을 연이어 출간했다. 그 책들이 유명해진 것도 맥컬레이 특유의 일러스트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과학, 특히 물리하면 직선과 도형, 어려운 수식들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에게 땅바닥에 그린 것처럼 울퉁불퉁한 이 책의 일러스트는 우선 읽는 부담을 덜어준다.
맥컬레이의 일러스트는 이와 함께 시점(視點)의 전환에서 독특하다. 보통 도구나 기계의 작동 원리를 설명하는 일러스트는 톱니바퀴의 맞물림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고 여기에 회전방향을 알리는 화살표가 추가되는 식이다. 그런데 맥컬레이는 여기에 사람을 그려놓았다.
예를 들어 걸리버가 소인국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작은 손톱깎이 하나에 사람들이 매달려 지레를 움직이려 애쓰는 모습들이 나온다. 또 악기 위에서 사람들이 다니고 그 아래로는 강물이 흐르는 식이다. 이는 보는 사람을 도구나 기계 안으로 이끄는 효과를 갖고 있다. SF영화에서 인체 내부를 여행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처럼 도구나 기계의 내부를 여행하는 식이다.
일러스트에서 빠뜨릴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매머드’다. 이 책은 매머드를 잡는 것에서 시작해 매머드가 디지털 세계를 떠나는 것으로 끝난다. 매머드는 잠수정을 설명할 때는 잠수부가 되고 비행기를 설명할 때는 파일럿이 된다. 그 우스꽝스럽고 귀여운 모습이 이 책의 마스코트가 됨은 물론이다.
그렇다면 왜 맥컬레이는 매머드를 등장시켰을까. 어쩌면 먼 옛날 빙하기에 사라진 동물 매머드를 통해 도구와 기계가 발달하지 않은 원시 상태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매머드를 사로잡은 사람들은 매머드를 위해 갖가지 도구를 만들어야 한다. 또 매머드 자신이 인쇄술을 개발하고 비행기를 발명하기도 한다.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돌아갔을 때 우리의 모습이 그렇지 않을까. 내가 지금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는 작은 도구 하나라도 처음 만들어야 한다면 원리부터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매머드는 질문을 던지는 화두인 셈이다.
흥미로운 점은 매머드의 귀여운 모습과 달리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아주 진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자력을 설명하는 장에서 맥컬레이는 누군가 도시에 콘크리트로 만든 거대한 매머드를 두고 갔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이 매머드는 작은 알갱이 몇 개와 물만 주면 코에서 증기가 나와 겨우 내내 도시에 필요한 열을 공급했다.
문제는 쓰레기. 무거운 용기에 잘 묻으라고 했지만 귀찮아진 도시 사람들이 쓰레기가 나오는 매머드의 뒷부분을 도시 밖으로 두는 식으로 해결했다. 그러나 봄이 돼 도시 밖으로 나가보니 쓰레기 주변의 나무에는 아직 잎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트로이의 목마를 빗댄 콘크리트 매머드를 통해 맥컬레이는 원자력 폐기물의 위험에 대해 경고한 것이다.
이 책은 아무 곳이나 펼쳐도 정보의 양이 많기 때문에 색인을 활용해 필요한 부분만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읽을 거리가 많은데다 이해해야할 과학 원리 또한 만만한 것이 아니어서 무턱대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겠다고 했다가는 1장만 달달 외는 참고서처럼 앞부분만 보기 십상이다. 약간 산만한 책의 구성도 이 점에서 단점이 된다. 그래서 각 장의 처음에 나오는 매머드 이야기는 부모들이 우선 읽은 뒤 작가가 숨겨놓은 의미를 자녀들에게 설명해주는 것이 이 책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된다.
상대성이론을 만든 아인슈타인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준 나침반에 푹 빠져 결국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됐다고 말했다. 또 양자역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한 미국의 물리학자 파인만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장난감 차 위에 놓인 구슬이 차의 진행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을 실험하면서 운동의 상대성과 관성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됐다고 한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 사물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준 아버지, 어머니가 있을까. 다시 이 책을 부모와 자녀가 함께 읽을 것을 권하는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다.
이영완 동아사이언스기자 puse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