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모든 외할머니들께 바치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정향 감독은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부터 계속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에 대한 탐색과 접점에 대한 희망을 영상 언어로 옮기고 있더군요. 일찍이 시인 황지우는 “요는, / 내 대갈통 속의 러시아 혁명과 / 내 대갈통 밖의 제정 러시아 말기가 만나는 접점이 안 보인다는 점이렸다”고 읊었지요. 관념과 현실의 거리, 과거와 미래의 차이, 너와 나의 다름은 살면서 누구나 겪는 어지럼증같은 것입니다.
미술관과 동물원은 참 어울리지 않는 장소입니다. 한쪽은 끝없이 고즈넉하고 한쪽은 쉼없이 움직이지요. 이정향 감독은 ‘옆’이라는 글자 하나를 박아 이질적인 두 공간을 이었습니다. 장미 옆에 구름을 놓고 빌딩 옆에 묘지를 세우는 것은 시인의 영역입니다.
영화는 시적 비약의 모호함을 등장 인물과 이야기로 설명해야 하는 부담이 있습니다. 참신한 발상의 영화들 중 상당수는 자폐에 빠지거나 난해로 기울지요. 이정향 감독의 장점은 지나치게 자유로워 오히려 낯선 발상을 생크림처럼 부드럽게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그 재능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집으로…’는 7살 손자와 77살 외할머니의 접점을 찾아가는 영화입니다. 첫만남은 누구나 서먹한 법이지요. 전형적인 서울 아이 상우는 산골에서 평생을 보낸 외할머니에게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외할머니가 다가오자 상우는 화면 끝자락까지 뒷걸음질을 치지요. 미술관 옆 동물원처럼 상우는 외할머니 옆에서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이제 이 둘의 단순한 병렬을 하나로 합치는 과정이 남았습니다.
외할머니가 말도 못하고 글도 모른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처음에 이것은 상우가 외할머니에게 다가서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접점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둘 사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외할머니가 보여주는 삶의 방식은 상우에게 쉽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77년 동안의 희노애락에서 만들어진 자세를 7살 꼬마가 어찌 알 수 있겠는지요. 상우는 계속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며 외할머니를 괴롭히지만, 외할머니는 어떤 강요도 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손해를 감내하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손짓할 뿐입니다. 손자가 자신을 이해할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요. 외할머니의 무조건적인 손자 사랑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도 그 순박한 사랑에 대한 그리움이겠지요.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한 향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에 오르기 직전, 상우는 외할머니의 손에 엽서 몇 장을 쥐어줍니다. 상우가 서울에서 가져온 로봇 사진이 담긴 엽서의 뒷장에는 상우가 밤새 그린 서툰 그림이 있지요. 손자는 외할머니의 마음을 ‘아프다’와 ‘보고싶다’로 이해하였습니다. 외할머니가 장대비를 맞으며 닭을 사왔듯이 상우도 할머니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결국 상우는 떠나고 외할머니는 쓸쓸히 홀로 남았지 않느냐고, 감독이 제시하는 접점의 순간은 지나치게 동화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습니다. 문학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호로 이해한 황지우의 시집 ‘나는 너다’를 읽고 난 후에도 비슷한 의문이 들었었지요. “만세, 만세/ 너는 나다. / 우리는 전체다. / 성냥개비로 이은 별자리도 다 탔다.”고 외친 후에도 거리는 남고 접점은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비록 이 접점이 자족적이고 선언의 의미가 있다고 해도, 내 ‘옆’의 존재를 내 ‘안’의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삶의 근본일 것입니다.
욕심을 하나만 더 내어보자면, 박제화된 역사 인물과의 만남이 이정향 감독의 다음 작품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 대상은 전태일일 수도 있고 이순신이어도 무방합니다. 자신의 경험이나 기억이 틉입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까지 미끄러져 내려가면, 거리 좁히기와 접점 만들기의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을까요.
김탁환 〈소설가·건양대 교수〉 tagtag@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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