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에 ‘강아지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실물경제가 ‘주인’이라면 주가는 주인과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라는 것이다. 18세에 주식투자에 뛰어들어 70년이 넘도록 투자를 한 헝가리 출신의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비유다. 내용은 이렇다.
“주인이 산책 나가면 강아지도 따라나선다. 보통 강아지는 주인 뒤를 따른다. 그러나 강아지가 주인이 가려는 방향을 눈치챌 경우 한참 앞서나가기도 한다. 앞서가는 강아지는 때때로 오던 길을 돌아보며 주인이 뒤따라오는지 확인한다. 주인이 보이면 강아지는 계속 간다. 그러나 주인이 보이지 않으면 놀라서 주인을 찾으러 되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주인을 지나쳐 주인보다 훨씬 뒤로 가기도 한다. 주인을 찾으면 다시 주인과 앞서거니 뒤서거니를 반복한다.”
강아지 이론은 주가는 궁극적으로 실물경제를 반영한다는 ‘그림자 이론’의 한 변형인 셈이다.
그러나 요즘 이와는 달리 ‘주가 자체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실물경제의 한 현상’이라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물경제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증시 자체만으로 한국 경제의 변화를 주도하는 독립변수가 됐다는 것이다.
▽그림자가 몸통을 흔든다〓“오늘 주식시장에서는 국민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낭보가 전해졌습니다. 종합주가지수가 30포인트 급등하며 단숨에 900선을 회복했습니다.” 지난달 2일, TV에서 9시 뉴스를 진행하던 앵커가 전한 소식이다.
주가 상승은 주식투자를 하지 않는 사람에게 별 의미가 없는 소식이다. 그렇지만 이 앵커는 ‘국민의 가슴’을 후련하게 하는 낭보라고 말했다. 증시는 더 이상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만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뜻일까?
“지금 한국 경제는 주식시장이 활성화돼야 전체 경제가 살아나는 구조다. 저금리를 바탕으로 한 주식시장의 활성화, 그리고 이를 통한 실물경제의 부양, 이것이 우리 경제의 핵심 모습이다. 생각해 보라. 주식시장의 활황이 없었다면 무슨 수로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부채비율 200%를 맞출 수 있었으며, 재무구조가 열악한 중소 벤처기업들이 어떻게 지금처럼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겠는가.”(신한증권 정의석 부장)
이 설명에 따르면 증시는 실물경제의 그림자가 아니라 실물경제의 한 부분이다.
그림자(주가)가 몸통(실물경제)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사례〓지난해 10월 이후 형성된 증시의 대세 상승 과정과 이후 한국 경제의 모습을 살펴보면 이 지적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국 증시는 아무도 경제가 좋아질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미국 9·11테러 이후부터 꿈틀거렸다. 지난해 11월 종합주가지수가 600선에 육박하자 전문가들은 “이번 장세는 외국인에 의해 주도되는 사기(詐欺)성 장세” “펀더멘털은 나빠지는데 주가가 오르는 것은 외국인의 돈 장난에 한국 투자자들이 놀아났기 때문”이라며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나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증시의 활성화는 결국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을 바꿔놓는 역할을 했다.
한국 시장의 건전성이 외국인 투자자에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다른 동남아 신흥시장에 비해 한국 경제는 뭔가 다르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최근 이어진 국가 신용등급 상향 조정과 기업들의 원활한 자금 조달도 모두 지난해 10월 이후 증시 활성화를 계기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된다.
경제가 좋아져서, 혹은 좋아진다는 예상이 확산됐기 때문에 주가가 오른 게 아니었다.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증시가 먼저 좋아졌고 이후 경제가 따라서 좋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90년대 초반 종합주가지수는 경기를 예측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경기선행지표 구성요소에서 탈락했다. 그러나 10여년 만에 명예를 회복한 것이다.
▽미국식 경제인가〓미국의 거시 경제에서 주가나 환율은 경제의 독립변수로 기능한다. 주가가 오르니 국민들의 소득이 늘고, 소득이 증가하면서 소비가 촉진돼 실물경제가 활성화하는 형태다. ‘강한 달러’ 정책으로 표현되는 외환시장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순환고리가 형성되고 있다. “올해 주가 상승으로 국민들의 가처분소득이 확실히 증가하고 이로 인해 소비가 촉진될 것이다. 이는 결국 유통업체의 실적 호전 등 실물 경제를 부양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크다.”(김호연 동부증권 애널리스트)
주가 상승이 실물 경제를 부양한다는 얘기다.
9·11테러 이후 증시는 한국 경제의 중심축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한국은행은 금리를 결정할 때 증시를 먼저 쳐다본다.
박효진 신한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외환위기 이후 은행을 중심으로 한 금융시스템이 붕괴되면서 증시의 역할이 급속도로 확대됐다”며 “한국 경제의 한 축으로 한국 증시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분명하며 이 같은 현상이 더 정착되고 발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