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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짓는집]합리성과 진실은 아무 관계가 없다

입력 | 2002-05-10 17:22:00


천재수학자 존 내쉬의 파란만장한 삶을 다룬 ‘뷰티풀 마인드’에는 정신분열증에 걸린 내쉬를 진단한 어느 법정 자문 정신과 의사 얘기가 나온다. 수많은 범죄자의 정신상태를 검사했던 그마저도 내쉬의 경우에는 정상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천재들은 미쳐도 논리적으로 미치는 모양이다. 과대망상과 피해의식으로 점철된 내쉬의 편지는 종종 “아마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 개념이 불합리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이라는 친절한 설명으로 시작할 정도였다니 말이다.

논리적인 정신분열자라면 칼 세이건의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에 등장하는 커크 앨런이 있다. 앨런은 낮에는 로스앨러모스 국립연구소의 핵 물리학자로, 밤에는 먼 미래의 우주선을 조종하는 커크 선장으로 살고 있었다. 앨런의 망상은 상당히 논리적이었다. 미래의 여행에 관한 1만 2000 쪽의 글과 ‘스롬 노르바엑스의 크리스토페드의 독특한 두뇌 개발’ 따위의 공상적인 논문을 여럿 쓸 정도였다.

심리분석학자 로버트 린드너는 앨런을 치료하기 위해 그의 망상 속으로 들어갔다. 먼 미래의 커크 선장은 린드너를 환영했고 오랫동안 미래 사회에 대해 토론했다. 앨런의 망상은 린드너를 설득할 만큼 완벽했고 마침내 린드너는 커크의 망상을 즐기기 위해 면담시간을 기다릴 정도였다.

이 특이한 상담은 의사의 변화를 두려워한 앨런이 스스로를 정신분석하고 자신의 망상이 거짓임을 밝힌 뒤에야 끝났다. 이 결말을 전해 듣고 세이건이 안도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만, 문제는 회의론자 세이건의 생각만큼 간단하지 않다.“내 의자와 환자용 침상은 단지 가느다란 선으로 분리되어 있을 뿐”이라는 린드너의 고백처럼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니까.

추리소설이란 숨겨진 범죄 이야기를 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말한 사람은 츠베탕 토도로프다. 추리소설에서는 진짜 이야기와 가짜 이야기가 정면으로 충돌한다. 범인의 이야기와 탐정의 이야기. 셜록 홈즈 시리즈 등 고전 추리를 읽다 보면 홈즈가 범죄의 진상을 밝힐 때 가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범인이 사건을 호도하기 위해 만든 엉성한 이야기의 모순점을 홈즈는 명쾌하게 풀어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홈즈의 이야기는 범인보다 합리적이다.

하지만 진실의 기준을 합리성에만 두고 본다면 의사들을 납득시킨 내쉬나 앨런의 황당한 이야기도 진실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 결국 추리소설의 합리성은 탐정의 합리성이며 정신치료의 합리성은 의사의 합리성일 뿐이다. 합리성과 진실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진실은 가끔 모두에게 드러난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진실의 대부분은 모두의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진실일 확률이 더 많다. 왜냐하면 우리는 합리성과 진실을 혼동하니까.

소설가·larvatus@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