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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포커스]은행들 여신심사기준 ‘경영지표 위에 X파일’

입력 | 2002-05-13 17:58:00


경영자가 자사 주요 제품의 원가를 모르면 은행의 불신을 받게 된다. 또 속칭 ‘힘있는 사람’을 잘 안다고 떠벌리거나 이들을 통해 대출을 청탁하는 경영자도 요주의 거래처로 분류돼 은행 거래가 쉽지 않다.

이는 기업대출을 오랫동안 해온 은행의 대출담당자들이 대출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할 때 이용되는 주요 잣대다. 물론 가장 중요한 대출판정 기준은 기업의 재무제표, 장래의 성장성 수익성 등이다. 이를 위해 대출담당자는 현장을 방문해 가동률, 재고 등을 확인한다.

기업대출 업무를 22년간 맡아온 이석우 한빛은행 부장(수석심사역)은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재무 및 손익지표 외에도 ‘Ⅹ파일’이 더욱 비중 있게 활용되곤 한다”고 밝혔다.

Ⅹ파일은 내부 축적돼 대외비로 관리되는 대출담당자들의 ‘암묵지(暗默知)’이다.

▼노하우-내부전문가 총동원▼

▽기업대출은 떼일 위험이 높다〓13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2월 말 현재 은행권이 기업에 빌려준 대출 잔액은 지난해 말보다 7조원가량 증가한 201조128억원. 작년 1∼9월 중에 상장 제조업체 36.3%의 이자보상배율은 ‘1’ 미만이다. 상장된 제조업체라도 10개 가운데 4개정도가 번 돈으로 이자도 내지 못하는 것.

은행 입장에서는 연 6% 안팎인 이자를 받으려하다 대출 원금을 모두 날릴 수 있는 위험이 꽤 높기 때문에 대출 심사 때 축적된 노하우와 내부전문가를 총동원하고 있다.

▼술부터 권하면 일단 의심을▼

▽경영자를 보면 기업 미래가 보인다〓이 부장은 지난해 대출을 신청했던 D기업 경영자에게 “제품 원가가 얼마냐”고 물었다. 경영자가 “잘 모른다”고 대답하자 돈을 잘 빌려주지 않았다. 경영자가 회사 이외의 것에 더 신경을 쓴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0대 그룹에 포함됐던 H기업의 대표는 대출담당자에게 식사부터 한끼 하자고 제의했다. 몇 번의 제의가 있은 후 음식점에서 만나게 되자 다짜고짜 술을 권했다. 담당자는 “식사 대접부터 하려는 기업은 일단 요주의 관찰대상”이라며 “특히 중요한 결정을 술기운을 빌려 하자는 경영자는 믿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이 회사는 결국 대출을 받지 못했고 몇 달 후 부도 처리됐다.

중견기업급으로 자금 또는 구매부서에 경영자의 친인척이 포진해 있는 기업은 1급 요주의 대상. 비리가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하청기업에 찾아가 접대를 받는 기업도 물론 주의 대상이다.

경영자가 “권세가와 친하다”거나 “은행 고위층과 연줄이 있다”고 과시할 경우 ‘외압을 동원하려는 인사’로 요주의 대상에 분류된다. 경영자가 사무실에 정치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크게 붙여놓거나 읽지도 못할 외국어 원서나 전집류를 전시용으로 꽂아둔 경우도 인상이 좋을 리 없다.

축첩(蓄妾)하는 등 사생활이 복잡한 경영자도 기피대상.

경영자가 골프를 하는 것은 종전에는 감점(減點)요인이었지만 골프와 경영은 상통하고 잭 웰치 등 핸디캡이 낮은 경영자가 경영성과도 좋다는 외국 사례가 소개되면서 요즘에는 반대로 바뀌었다. 다만 주중에도 골프장에 나가고 주로 내기골프를 한다는 풍문이 업계에 도는 경영자는 요주의 인물로 꼽힌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10년 이상 기업대출을 담당한 김운영 신한은행 차장은 “중소기업에서 경영자의 기업관, 사업에 대한 열정 등이 기업의 미래를 80% 정도 좌우한다”고 말했다.

▼경리담당 잦은 이직 ‘위험’▼

▽직원 움직임은 기업의 바로미터〓김 차장은 종종 오후 2∼4시에 거래기업을 찾는다. 이 때는 자금을 막아야 할 시간이어서 경리 또는 자금담당자가 자리를 비우는 횟수가 많으면 자금사정이 좋지 않다는 증거여서 위험신호로 받아들인다.

회사 사정을 잘 아는 경리담당자가 자주 바뀌면 경영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뜻이다.

방문객에게 첫 인상을 주는 수위나 안내자가 인사를 않거나 불친절하며 퉁명스럽게 말하는 것은 회사에 대한 불만으로 충성심이 없다는 뜻이어서 대출이 까다로워진다.

김선규 조흥은행 과장(심사역)은 “직원들이 업무에 열의가 없거나 표정과 행동이 활기차지 못하거나 상사와 당당하게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뒤에서 불만을 털어놓는 기업은 미래가 밝지 않다”고 말했다.

▼불결한 직원식당도 감점▼

▽근무환경도 대출심사 기준〓대출담당자는 기업의 식당 화장실 등을 유심히 살핀다. 이 곳이 깨끗하지 않으면 경영자가 직원을 중시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된다.

반면 경영자가 구내식당에서 직원과 식사를 하며 의견을 듣거나 직원을 위한 운동공간 기숙사 등 복지시설을 만드는 기업은 가점이 주어진다.

자재창고나 사무실이 정리 정돈돼 있지 않은 기업은 경영자의 관심이 다른 곳에 있거나 직원의 책임의식이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환경오염으로 민원이 발생하는 경우, 회사 내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경우, 회의가 잦아지고 시간이 늘어나는 경우 등도 위험 징조이다.

이 부장은 “중소기업에 대기업 출신 대표가 오면 썩 좋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며 “대기업처럼 고급인력이나 조직의 뒷받침을 못 받아 대부분 경영성과가 좋지 않고 직원을 무시하거나 현실을 무시한 1등주의 추구로 갈등을 빚는 일이 잦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상철기자 sckim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