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에서 살다가 서울로 주거지를 옮기려고 집을 찾아 나섰던 지난 두 주일의 경험을 아무래도 얘기해야겠다. 폭등한 집값과 들끓는 주택시장의 광기에 대하여.
누구는 10년주기설을 얘기하고 다른 이는 완만한 상승 끝에 발생한 일시적 폭등이라고도 한다.
어느 부동산중개소에서 부닥쳤던 중년의 주부는 유난히 어려웠던 지난해 수능시험이 서울 중심부로의 U턴을 부채질했다고 강조했고 평생 부동산중개업을 했다는 나이 지긋한 노 전문가는 일반적 주택 부족을 지적했다.
▼집값폭등에 박탈감 깊어져▼
여하튼 서울의 주택가격은 이미 폭등한 상태였다. 강남구 대치동에서 시작한 상승세가 인근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순식간에 주택가격을 1억원 정도 올려놓았으며 전세금도 덩달아 1억 원이 뛰었다. 그곳을 중심으로 반경 약 2㎞가 가격 폭등의 핵이었는데 그곳에서 멀어질수록 가격 상승의 폭은 완만하게 하락하는 양상을 보였다. 주택소유자는 가만히 앉아서 1억원을 번 셈이고 세입자는 갑자기 1억원에 이르는 부가전세금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서울 중상층의 평균 주거 규모인 31평형 아파트가 4억5000만원을 호가하고 있으니 입이 딱 벌어진다. 지방에 비해 주거환경이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닌 데도 말이다.
가는 곳마다 열기가 느껴졌다. 분양사무소에는 인파가 넘쳤으며 추첨이 완료된 신축아파트 부근에는 분양권에 엄청난 프리미엄이 속절없이 붙었다. 실수요자와 투기자들이 뒤범벅된 그 열기의 공간에는 경제학도, 주택정책도 유효성을 상실한 듯했다. 근거 없는 입소문과 부동산업자들이 흘린 정보들이 거래행위를 결정했다.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사회현실을 10년 넘게 연구하고 강의해온 사회학 교수인 필자도 그 물결 속에서 판단 근거를 잃었다. 뒤늦게 뛰어든 주택시장에서 필자가 의존해야 했던 것은 30여장에 이르는 부동산중개업자들의 명함뿐이었다.
강남구와 강동구를 돌아 경기 성남시 분당에 이르는 현장답사에서 내린 결론은 일시적 퇴각이었다. 며칠 전 귀갓길에 스쳤던 분당의 파크뷰는 서민을 거부하는 오만한 성곽처럼 느껴졌는데 비리 보도를 접하면서 그것은 곧 분노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일단 퇴각, 그러나 집값 폭등의 중압감과 대상을 알 수 없는 분노를 떨칠 도리가 없다.
사정이 이럴진대 서민의 서러움과 불안감은 오죽하랴. 집값 폭등의 원인은 차치하고 주택시장의 이상 열기와 그 결과가 한국 사회 전반에 몰고 온 충격은 그야말로 메가톤급이다.
우선 부유층을 지칭하는 ‘상류사회’가 형성되었다는 점이다. 서울 중심지역의 대형아파트 소유자는 이미 10억원 이상의 대재산가로 바뀌었다. 그 동안에는 입밖에 내기를 꺼렸던 ‘상류사회’라는 단어가 광고 카피에 공공연히 등장해 소비자를 유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게끔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능력과 노력의 합리적 결과라기보다는 위험한 선택과 운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둘째, 부유층과 일반 서민의 간격이 급작스레 커진 정도로 서울과 지방의 격차도 더욱 벌어졌다. 서울 전입자들은 이른바 ‘아파트공화국’에서 이류시민을 면치 못한다. 지방의 괜찮은 아파트를 처분해서 어지간한 전세라도 얻으면 다행이니 말이다.
이 격차가 누구라도 승복할 만한 합리적인 것이 아닐진대 한국사회를 휩싸고 있는 상대적 박탈감과 불만은 어떤 정책으로도 해소될 성싶지 않다.
▼전국민 도덕성 마비 위기▼
셋째, 그렇다고 서울의 중상층이 편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주택시장의 동향에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으면 언제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심리는 그들이 더하다. 그래서 전 국민은 언제라도 투기를 감행할 준비를 해야 한다. 위험한 선택에 운이 따라주기를 고대하면서. 중추신경이 주택시장의 동향에 포획된 상황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들먹이고 도덕성을 호소해봐야 반향이 있을 리 없다.
10년 전 통계에 의하면 서울 시민의 5분의 1이 한 해에 적어도 한번 이사를 한다는 것이었는데 그 사정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민의 애환과 중상류층의 축재욕이 뒤섞인 결과다. ‘주택 굴리기’로 부유층에 앞다투어 진입하는 사회이기에 상층부일수록 물질주의에 더욱 집착하고 사회적 봉사와 자선에도 더 인색하게 되는 것이다. 서울발 아파트 광기가 전 국민의 정신을 마비시키는 것을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