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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지금/세계 축구조류]포르투갈

입력 | 2002-05-14 21:49:00


쓰러질듯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타원형 경기장은 골대 뒤편 스탠드가 벗겨져 나갔다.

수도 리스본 북부의 르스경기장. 포르투갈 리그 - 벤피카의 본거지다. 옆에선 2004년 유럽 선수권을 위한 신경기장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2개의 경기장이 겹치기 때문에 사용중인 경기장의 일부분을 깎아냈다.

활짝 개인 하늘. 모래바람 저 멀리에 이탈리아반도 최고급 쇼핑센터가 보인다.

" 이 근처는 들판이였지요." 경기장에서 조금 벗어나자 택시기사가 입을 열었다. 근대적인 경기장이 들어서면 풍경은 확 변할 것이다.

운전수 이름은 엘 네스트 피게레이드(64). 66년 월드컵 대표 포워드라고 한다. 9골을 넣어 득점왕이 됐고 포르투갈을 3위로 이끈 영웅, 에우제비오(60)의 대기선수였다.

" 발전한 것은 축구도 마찬가지. 옛 연습장은 맨땅이었다. 70년대 벨기에서 플레이하면서 조국에서 받던 급료의 배에 달하는 돈을 받았다.(당시 포르투갈은) 뒤떨어진 나라였다."

▼국력 성장 위한 선수 배양 ▼

74년 4월, 무혈 쿠데타로 30년대부터 계속된 독재정치가 끝났다. 정권 쟁탈전이 끝나고 포르투갈에 신시대가 도래하는 것은 80년대다. 포르투갈은 86년 유럽 공동체(EC, 현EU)에 가맹하며 유럽속 빈민국에서 발전하기 시작한다. 막대한 보조금으로 고속도로가 연장되고 거리가 다시 정비되었다. 국내 총생산은 5배의 성장률을 보였다.

에우제비오 이래, 포르투갈인으로서 35년만에 유럽 최우수선수가 된 루이스 피구(29)나 루이코스타(30)들은 이 시대 사람들이다.

피구가 자란 아르마다는 리스본을 바라보고 흐르는 데죠강 맞은편에 위치에 있다. 헬리콥터를 탔다. 강 폭은 약 2km. 여행은 약 10분만에 끝났다.

피구는 12세에 오스 파스티랴스라고 하는 작은팀에 들어갔다. 전 회장 안토니오 베르시오르는 "시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무엇인가 이루어질 듯한 기운이 돌았다. 그래서 유소년 팀을 만들었다"고 했다.

죠제 브지오회장은 피구의 유년시절을 이렇게 말한다. "매우 점잖고 예의바른 아이였습니다. 다만 작고 말라서 큰 선수가 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어요."

피구는 13세가 되기 전에 스포르팅으로 옮겼다. 당시 감독이었던 죠안·바르나베의 피구에 대한 첫 인상은 좋지 않았다.

"138cm, 35kg의 가날픈 체구때문에 팀에 넣어야 할지 한달여 고민했다. 그러나 결국 피구의 명석한 두뇌플레이에 높은 점수를 줬다" 며 당시의 소감을 밝혔다.

이윽고 피구는 공격형 미드필드로 유스(20세 이하) 대표팀의 주축선수로 성장한다. 피구는 91년 세계 유스 선수권에서 포르투갈에 대회2연패라는 영광을 안겼다.

피구는 옛 이야기를 하면서 리스본의 중심가를 걸었다. 7살 언덕의 거리라고 불리우는 수도는 비탈길이 많아, 오렌지색의 지붕이 언덕에 밀집하듯이 달라 붙어 있다. 좁은 돌층계의 비탈길을 전차가 달리고 있고 레스토랑의 점포 앞에는 생선이 놓여 있다.

어두컴컴한 레스토랑에서 듣는 민중가요 '파드'가 그리움이나 안타까움을 의미하는 사우다데를 느끼게 했다.

포루투갈에 왠지 모르게 어두움이 느껴지는 것은 지난시절의 독재 때문일까. 그러나 나라도, 축구도 변하고 있다.

축구 협회 부회장 안토니오·보로냐가 위엄 있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구 1000만명의 나라가 세계 랭크 4위까지 올라오긴 쉬운 일이 아니었다. 84년에 대표 팀을 정비했다. 젊은 선수 육성을 위해 정부에서 보조금이 나오는데 연간 200만 유로( 약 2억3000만엔) 가까이 된다. 청소년 선수의 강화가 현재 대표팀의 기초가 됐다. 잊어서는 안될 인물이 케이로스다."

카를로스 케이로스(49). 감독으로 89, 91년 세계 유스 선수권에서 포르투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그는 J리그 나고야에서도 감독을 한 경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