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식의 다른 길/존 브룸필드 지음 박영준 옮김/328쪽 1만2000원 양문
“나는 철학 법학 의학에다가, 오 맙소사 신학까지 그토록 혼신을 다해 공부하고도 조금도 똑똑해지지 못한 채 지금 한 사람의 불쌍한 바보로 여기에 서 있을 뿐이다. 석사요 박사요 하며 벌써 10년 세월 학생들의 코를 앞으로 뒤로 위로 아래로 가로 지르고 빙빙 돌며 잡아 흔들어 보았지만 내가 알게 된 것은 결국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뿐…. 슬프다. 나는 언제까지 곰팡이로 덮힌 이 저주받은 골방에 처박혀서 살아야 한단 말이냐.”
잘 아는 괴테의 시극 ‘파우스트’의 첫 장면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는 소크라테스에게 한 제자가 이렇게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철학이란 나날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이다.”
괴테나 소크라테스같은 대문호와 대철학자가 쏟아 붓는 이 ‘절망’과 ‘무지’의 언어들은 무엇인가. 그들이야말로 무불통지(無不通知)일텐데 도대체 무엇을 아직도 모른다는 말인가.
‘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아는 것이 힘일 때도 있고 병일 때도 있다. 앞에 아는 것과 뒤에 아는 것은 어떻게 다른가. 내가 안다고 믿는 것은 참인가, 거짓인가.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20년간 인도사를 가르친 존 브룸필드가 펴 낸 ‘지식의 다른 길’이란 책을 읽다 보면 이처럼 지식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에 휩싸인다. 저자는 학교에서 배우는 것만으로 우리 삶이 충분한가라고 묻는다. 오히려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참이라고 믿고 있는 지식이 불과 300∼400년 전에 만들어진 기형적이고 왜곡된 것’이라고 공박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의학적 ‘지식’의 증가로 수명이 길어지고 병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오히려 전문화되고 분화된 현대 의학은 인간의 몸을 기계로 파악하고 각 부품의 작동 방식만을 문제삼아 우리에게 건강함을 유지할 권리를 빼앗은 것은 아닌가?
저자는 아들이 복막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의 경험을 소개한다. 진료차트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보려고 했을 때, 간호사는 진료기록을 빼앗으며 이렇게 쏘아 붙인다. “이건 당신이 읽으라고 있는 게 아니에요. 때가 되면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실 거에요.”
그러나, 현대의학이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인간은 이미 자신의 신체를 조화롭게 조절하고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오지 않았는가? 저자는 이렇게 ‘의학지식’의 실체를 파헤치며 지식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던진다.
‘지식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은 17세기 철학자 데카르트다. 그는 명석함(clarity)과 판명함(distinct)의 방법론을 주장한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분석가능하며 연역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이러한 방법론이 그 이후 300년 동안 현대의 지식이 추구해 온 것이다.’
통상 우리가 과거 현재 미래로 알고 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그렇다. 너무 단선적이고 거친 인식은 아닌가. 서구 산업사회의 가장 큰 오류는 미래를 진보나 발전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를 파괴한다.
그러나, 과연 시간은 저울로 재듯 고른 것이며 언제나 동일한 가치를 가진 것인가. 고대인들에게 시간은 가득 찰 수도 텅 빌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무겁거나 가벼울 수도 있다. 축제 때에는 은혜로운 것이었고 재앙이 있을 때는 악의적인 것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 태어나지 않은 자가 함께 했던 시간도 있었다. 어떤 사학자가 중세 유럽을 설명하면서 말했던 것처럼 산 자는 그저 ‘또 다른 연령 집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나 보어, 하이젠베르크 등을 잇는 양자역학 이론가들이 ‘양자도약’이니 ‘불확정성 원리’니 ‘카오스’니 하는 다양한 개념을 내세워 논쟁을 벌이고 있지만, 이들이 말하는 한가지 공통점은 ‘단선적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영원한 현재’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의 다른 차원일 뿐이다. 현재를 사는 것은 미래를 계획하는 것보다 훨씬 시급한 일이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저자는 인류가 당면한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지식 체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기존 체계를 고수하려는 쪽이나 비판하는 쪽이나 폭력적이고 파괴적이기는 비슷하다. 아예 지식의 패러다임 자체를 바꿔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저자가 제시하는 ‘지식의 다른 길’이다.
다른 길은 피안(彼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수만년을 통해 인간들이 자연과 함께 살아 오면서 체득해 왔다. 이제 우리는, 그것들에 눈을 돌려야 한다.
예를 들어 일면 비합리적이고 의미없는 일로 보이는 토템문화나, 뉴질랜드 원주민 마우리족의 풍습, 비서구권의 각종 제례들에 대해 진정으로 마음을 열었을 때 우리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면서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식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게 된다. 꿈이나 각종 제의, 자연, 자신의 영혼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받아 들이고 인정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 순간에 저절로 습득되어지거나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서구 중심이 아닌 비서구권 문화, 고대 사람들의 삶에 귀 기울이고 그 속에서 ‘공생’과 ‘사랑’을 배울 때 우리는 파괴와 단절로 가득한 현대 문명의 폐해들을 극복할 수 있다.
근대 서구문화들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전통적인 경제 문화 정치체제들을 말살해 온 한국역시 가장 빠른 속도의 성장으로 가장 빠른 속도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저자의 주장이 ‘지식’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라는 철학적 고민과 함께, 지금 이땅 우리에게 무겁고 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