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어느 한쪽이 골을 넣으면 처음처럼 센터서클에 공을 갖다 놓고 다시 시작한다. 그런데 골을 넣은 당사자는 이왕이면 멋있게, 관중의 시선을 최대한 끌면서 돌아오려고 한다. 관중들에게 주먹을 불끈 쥐거나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것이다.
우리 선수들 가운데 최고의 골 세러머니를 보여주는 주인공은 역시 황선홍이다. 비에 젖은 그라운드를 헤드 슬라이딩으로 넘어지면서 양 팔을 벌리는 유명한 골 세러머니는 수십 명의 카메라 앞에서 펼친 천부적인 연기였다. 지난 3월 핀란드와의 평가전에서도 황선홍은 주먹을 불끈 쥐고 포효하는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밤늦게 중계방송을 시청하던 축구팬을 안심시켰다. ‘나는 아직 건재하다. 뭘 그렇게 걱정하는가’ 라고 그는 온몸으로 증명했다.
이번에는 안정환이 화제다. 스코틀랜드전에 후반 투입된 그는 회심의 골을 거푸 터뜨린 후 결혼반지에 입을 맞추었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두가지 점에서 인상깊다. 우선 그가 상당히 여유있는 스트라이커로 성숙했다는 증거다. 그동안 우리 선수들은 골을 넣고 나면 흥분을 주체못하고 무조건 어느 한 방향으로 달려가다가 제 풀에 쓰러졌다. 특히 월드컵처럼 큰 경기에서는, 예컨대 98년 월드컵 당시 하석주(멕시코전)와 유상철(벨기에전)처럼 격정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라운드에서 쓰러져버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히딩크 사단의 신예들도 ‘의연한 킬러’의 수준에 이르기에는 아직 역부족인 듯하다. 이천수와 최태욱은 “내가 정녕 골을 넣었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듯 경악하면서 뒤늦게야 기도하는 자세를 취한다.
안정환도 얼마 전까지 그 수준이었다. 골을 넣고 나면 오른손을 쭉 뻗으며 카메라도 축구팬도 없는 이상한 방향으로 무조건 달려갔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 반지에 입맞추는 경지에 오름으로써 그가 여유있고 대범한 스트라이커로 성장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또한 그는 새로운 시대의 스타상을 무의식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동안 우리 선수들은 골을 넣거나 경기에 승리하면 ‘감독님 이하 동료선수들’ 아니면 ‘하나님과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느라고 바빴다. 심지어 ‘대통령 각하’까지 거론했다.
그 역시 아름다움 마음들이다. 그런데 어느덧 세월은 변하여 안정환처럼 ‘오직 한 명의 여인’에게 입맞추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주 매혹적이고 여유있는 자태로 결혼 반지에 키스하는 안정환의 골 세러머니는 “오직 나의 즐거움을 위해 공을 찬다”는 일본의 나카타와 더불어 한일 양국의 새로운 시대 감수성을 증명한 것이다.
그리스 조각상처럼 멋진 선수가 역시 그 만큼이나 매혹적인 골을 터뜨린 후 ‘이 세상의 단 한 명의 여자’에게 키스하던 순간, 수많은 남성 시청자들은 열등감에 시달렸을 것이며 또 수많은 여성 시청자들은 질투와 부러움으로 몸이 살짝 떨렸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축구는 ‘집단의 광기’에서 ‘개인의 발견’으로 아름답게 성숙해가고 있는 중이다.
정윤수 축구 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