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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읽는 책]시적 환타지로의 초대 '변신 이야기'

입력 | 2002-05-24 17:24:00


최근 몇 년 새 불고 있는 ‘그리스 로마 신화 열풍’의 원인을 진단하는 목소리는 다양하다. 가장 거창한 주장은 새 세기를 맞이한 사람들의 불안이 인류의 시원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는 것이고, 가장 즉물적인 해석은 포켓몬스터와 디지몬의 다양한 캐릭터와 그들의 진화과정을 달달 외워온 아이들이 복잡한 신들의 계보를 외우는데 재미를 들였다는 것이다.

분석적이면서 실용적인 주장도 있다. 인문학적 교양을 갖춘 386세대 부모들이 다양한 퀴즈게임 뿐 아니라 수능시험에도 도움이 되는 고전들을 아이들에게 적극 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 열풍이 일기 전에 사두었던 ‘변신 이야기’(오비디우스 지음 이윤기 옮김·민음사)를 이제서야 꺼내 읽게 된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조앤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에 푹 빠져 있던 아들이 책을 읽다가 ‘머리가 셋 달린 문지기 개’에 대한 얘기를 꺼내면서부터다. 문득 그리스 로마 신화 생각이 났고, 책꽂이에 꽂혀 있던 이 책을 근 3년만에 꺼내들게 된 것이다. 영화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도 등장한 지옥궁의 문지기 개 케르베로스가 나를 아득한 신화의 세계로 이끈 셈이다.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로마인이 재구축한 그리스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서양 중세 문화가 ‘기독교’와 ‘변신 이야기’라는 두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현란하면서 다이내믹한 상상력으로 직조한 이야기의 성찬은 경탄 그 자체다. 민음사가 이 책을 세계문학전집 맨 앞자리에 놓은 이유를 알 듯하다.

게다가 이윤기씨의 유려한 문장이 뿜어내는 감칠맛은 번역이 제2의 창작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굳이 계보를 구축하려 애쓰지 않아도 이야기의 재미와 문장의 마력에 빠져들게 된다.

역자는 이 책을 두고 ‘명쾌한 경망스러움’이라는 표현을 쓴 적이 있는데, 이는 주신(主神) 유피테르(제우스)의 ‘위대한 난봉’을 빗대어 한 말이다.

실제로 이 책의 전반부는 유피테르의 바람기와 그의 누이이자 아내인 유노(헤라)의 질투로 채워진다. 뿐만 아니다.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과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놀아난 혐의로 유배당한 저자는 ‘변신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이룰 수 없는 사랑에 할애한다. 물론 이 책이 그리스 신화와 아시아의 설화, 트로이아의 전사(戰史)에 로마의 건국신화를 보태 아우구스투스에게 신성을 부여하기 위해 쓰여진 방대한 ‘어용서’이지만, 그렇다고 오비디우스의 발칙한 상상력이 주눅든 것은 아니다.

미소년 나르키소스(나르시스)와 에코, 레우코토에와 클뤼튀에, 베누스(비너스)와 마르스 등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각각 비극적 멜로의 완성도를 갖고 있다. 특히 퓌라모스와 티스베 얘기는 만약 오비디우스가 살아 있다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 저작권 시비를 걸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은 ‘모든 것은 카오스에서 시작되었다’에서 부터 ‘카에사르의 승천’까지 모두 15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다이제스트된 다른 책들 만큼 쉽게 읽히진 않는다. 기원전 1세기의 고유명사를 그대로 살린 탓에 신들의 이름이 생소하고, 수많은 주석을 함께 읽어야 하는 수고도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원전을 읽는 풍요로운 기쁨을 가로채지는 못한다. 각박하고 얕은 현실을 잠시 잊고 기름진 시적 판타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느낌이랄까. 적어도 이제 ‘스파이더 맨’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느라 영화적 즐거움을 빼앗기지는 않을 것 같다.

유승찬(영화사 백두대간 전무)